예수님의 손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7. 예수님의 손길) / 본문 : 마태복음 8:1-4, 막 1:40-44, 눅 5:12-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의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 함께 공부할 주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은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준비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고 난 후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에 대해서 각자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아이들의 그림을 둘러보던 교사의 눈길은 이색적인 그림 앞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아! 아 그림 정말 멋진걸, 무얼 그린거지?”
선생님의 감탄 섞인 질문에 이 그림을 그린 한 여자아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이건요, 하나님의 손이에요.”
“오, 그래? 그런데 좀 이상하구나, 하나님의 손이 왜 이렇게 길지?”
그러자 그 아이는 커다란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뿌듯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그건요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돌보시려면 분명히 하나님 손은 이렇게 길거예요.”(G. D. James)

오늘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주앙교회에 미치실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 시리즈로 설교하는데 오늘은 말씀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위 한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았던 곳은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예수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습니다(막 1:30-31).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마 9:25, 막 5:41). 심지어는 예수님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도 낳았습니다(눅 8:43-48). 예수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신명기 16:15절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의 복이 예수님께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손을 내미시고, 손을 붙잡으신 것을 별 것 아닌 행동으로 생각하기 싶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레 11:40, 13:46).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므로 병이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깨끗한 능력이 병자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극적인 경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문둥병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병고침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 나온 많은 병자들 중의 한 이야기로 싶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의 모든 저자가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세 저자 모두 기록내용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남자라는 것, 문둥병자라는 것, 결단한 것은 나와있지만 나머지 사항은 의문이 많습니다. 즉 이름과 과거에 어떻게 지내고 살았던 사람인지 등이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태여 기록자 입장에서 변명을 하자면 수많은 사람가운데 갑자기 돌출적인 행동으로 예수님께 뛰어나온 이 사람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음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병원처럼 기록카드를 작성하고 진찰 받고 병을 고친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고 생각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너무 큽니다. 그런 나머지 저는 오늘 설교에 있어서 금기사항처럼 되어있는 성경에 다 기록하지 않은 점을 상상의 나래를 펴서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우리말에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을 바꿉니다.

제가 문둥병이 걸리고 나서 내게 손을 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손을 대지도 않았지만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손길이 닿은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 한차례도, 우연히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흔해빠진 일이 내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악수가 아내와 딸의 포옹이 그 옛날의 느낌을 찾아보려고 꿈속에서나 느껴보려고 잠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내게 다른 사람이 손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내 몸에 부딪히는 일도 없습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무리 속에 몸을 부딪히며 어깨를 비벼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리에 나다녀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랍비들도 나에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나의 집에 가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회당에도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접촉해서는 안될 대상이었습니다. 문둥병자 입니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제가 이 남자의 사연을 상상해 보는 것은 신약시대에는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온 몸이 패여 문들어지는 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실제로 이 문둥병 환자를 본적이 있습니다. 손과 얼굴이 문들어지고 살갗이 벗어졌는데 어린 나이에 차마 눈뜨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문둥병의 유형 중에는 말초신경이 마비되어 손가락과 발가락은 물론 손발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한 개인의 신체적으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결과도 심각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으로 통했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거주지로부터 추방되어 격리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문둥병이 걸렸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들 친구들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벌써 기억이 흐려지는데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무뎌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하고 지냈습니다. 한 손가락이 그러더니 점차 다른 손가락도 그랬습니다. 환절기가 되면서 완전히 손에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바깥일은 물론 집안에서 청소하는 일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심해져서 옷을 입는 것조차 힘겨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손을 담갔습니다. 물이 붉은 빛으로 변했습니다.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에 빈 것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신 옷에도 묻었어요.”아내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내 뒤에서 나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보고하러 갈 때 저도 함께 갈까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오. 혼자 가겠소.” 속에서는 같이 가자고 하는데 입에서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나는 돌아서는 순간 아내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딸 아이 얼굴을 한번 만졌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도 조용히 만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다른 사람의 감촉을 느낀 마지막입니다. 오늘까지…
제사장은 나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붕대로 둘둘 말린 내 손을 보고, 슬픔에 잠긴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 있다가 제사장은 입을 가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손을 내민 뒤 “부정하다.”라고 한 마디만 말했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선언으로 가족과 농장과 친구와 미래를 모두 잃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원망은 없습니다. 규정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아내는 옷 보따리와 빵 몇 조각과 동전을 들고 성문으로 날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본 이후에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은 얼굴조차 똑바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분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리나 차별에 대해서 이혼하신 분들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들도 압니다. 실직해 보신 분도 조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못 배우신 분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고 한쪽 귀와 코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짖을 했다고 이래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나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한번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몇 주 전 나는 내가 일구던 밭을 보려고 동네에 갔습니다. 멀리서나마 아내의 얼굴과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한참을 보았습니다. 해맑고 밝은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끌렸는지 잠시 나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문둥병자가 아니라 나는 농부였고, 아버지였고, 동네 아저씨였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에 도취되어 나도 모르게 나무 뒤에서 걸어나와 등등 꼿꼿이 펴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 나를 보았습니다. 뒤로 물러설 겨를도 없이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은 “문둥이다”하고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두 떠난 자리에 한 아이가 남아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꼭 내 딸 같았습니다. 내가 오늘 이런 행동을 한 것도 그 아이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후에 나도 모르게 성격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제 죽든지 살든지 해야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나는 분노에 찾습니다. 참으로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더 잃을 것이 무엇이 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고쳐야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죽이든 재앙을 더 내리든 고치든 결단을 내든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길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보는 순간 언제 내가 원한이 있었는지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토록 내 마음에 평온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꿇어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입을 떼시기도 전에 저는 그분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문둥이다. 부정하다”하면서 돌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나가오셨습니다. 나는 가만히 꿇어 앉아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손이 내 몸에 닫을 때 내 몸은 뜨거워졌습니다. 내 몸에 손을 댄 것은 아내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느껴보지 못할 줄 알았던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만졌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사장에게 가고있는 중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고 내 아내를 마음껏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딸의 얼굴과도 비벼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단순히 문동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만지지 않는 더러운 내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무가치한 자가 주님의 만지심으로 주님의 손길로 존귀한 자가 되었고 새 삶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 속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저희들에게도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잡기만 하면 됩니다. 부디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 없다고 뿌리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임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주앙교회 모든 성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국 교회의 한 지도자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세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기로 하고 그 형제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지요.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라고 묻더랍니다. 형제가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은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 즉시 돌아온 반문에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보다 성경 적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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