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보를 빼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8. 들보를 빼어라) / 본문 :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술은 파리, 정치는 시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정치는 시골뜨기나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귀부인(마담)들이 살롱에 앉아서 정치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남의 집 스캔들을 말하는 것보다 더 교양이 없는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총리의 이름은 몰라도 ‘앙리나 지단’같은 스포츠 스타들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되도록 이면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밖에 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편을 가르고 있고 또 거기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향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비판하는 버릇이 생깁니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자신에게 똥이 묻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보단 자신에게 묻은 똥이 남에게 묻은 겨보다 덜 더럽다고 굳게 믿고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난 발끝에 약간 묻었지만, 넌 몸 전체에 겨가 묻었잖아? 그러니 네가 더 더러워’라는 식입니다.

노먼 메일러는 흑인해방을 거부하는 미국의 젊은 세대를 향해서 ‘백색의 흑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얼굴빛은 희어도 그들의 마음과 말은 흑인들 보다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1. 비판하지 말라(1절)

티를 찾고 있는 사람 중엔 목사의 설교를 삐딱하게 듣거나 자기 표준에서 빗나간 것만 찾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항상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듣는 일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자신이 승진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가 있는 사람입니다.
‘비판하다’의 원문은 크리노(krivnw)는 ‘정죄하다, 결정하다, 판결하다, 언도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의 시제는 부정과거형(krivnete:크리네테)로 단 일회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심판자가 오직 한 분임과 동시에 한번의 심판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심판자는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한다면 계속의 의미가 담긴 현재 가정법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똑 같은 죄인으로서 엄격한 의미에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죄인과 의인으로 선고할 수 없습니다(롬 2:3, 약 2:12, 13, 5:9).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롬 14:10)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됩니다.
본문을 다른 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남을 저울질하지 말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내 허물 주머니는 뒤에 달고 다니고 남의 허물 주머니는 앞에 달고 다니기 때문에 내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4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페스(!vAfe”) 용납하다, 허락하라’는 이 말은 아주 강압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아주 강한 어조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경우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대화한 내용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완강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음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꼭 해야된다는 바로 이 단어 ‘‘아페스(!vAfe”) 허락하라’를 사용하셨습니다(마 3:15).
저는 이 말씀이 특히 우리 한국사람은 깊이 명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에 비해서 이 말씀을 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는 집단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속력이 강합니다. 서울월드컵 때 붉은티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은 적잖이 놀랐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가면 문제가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주 위험한 경우에 빠집니다. 흔히 여론 제판 같은 것을 합니다. 국민이 모두 나서서 사람을 잡습니다.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끝없는 용서뿐입니다.
둘째는 강압적인 태도입니다. 이것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주 충돌하고 남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지난번 식당에서 밥 먹는데 옆에 있던 청년,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외국유학경험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토론할 때 한국학생처럼 강조하는 사람이 없답니다. 다른나라 학생들은 다른 생각을 말하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인데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을 고쳐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합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태도로 밀어붙이면 안됩니다.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만 돕도록 해야 합니다.

클라크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도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설교 평은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설교를 잘했든 못했든
평해 줌으로써 당사자도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졸업 때가 되면 그 동안 닦은 기량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그 평을 듣는 과정이 있습니다.
한번은 김은석 학생의 차례가 되어 설교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당시교계를 풍자하는 동시에 다른 교파는 별것 없고 장로교만이 진짜 기독교라는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엉망입니다. 성결교는 울고불고해서 성가시고, 감리교는 소식이 감감하고, 구세군은 북치고 떠들어서 귀찮고, 장로교가 장관입니다.” 설교가 끝나자 학생들은 여기 저기서 웃고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어떤 학생들은 ”그거 진짜 설교다“라고 하며 농담반 진담반 조로 떠들썩했습니다.
잠시 후에 클라크 목사가 등단하여 설교에 대한 평을 하였습니다. “이 설교 참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습니다.” 설교에 진실성이 결여된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첫째, 자기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둘째,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내게 같은 경험이 있을 때 다른 이를 모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게 지도해주고 위해주어야 할 대상을 더 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치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의사가 치료를 하면서 “아프시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조금 아픕니다. 그러나 참을 만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제가 힘듭니다”라고 하면서 5분 또는 10분 씩 쉬어가면서 치료를 했습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의 아픔을 체감하는 의사라면 훌륭한 의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2.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5절)

오늘 본문의 제목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본문에서는 ‘들보를 빼라’는 명령은 하셨는데 어떻게 들보를 빼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사람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여”(5절)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 것입니다. 외식을 걷어내면 됩니다. “외식하는”이라는 뜻은 ‘연극하다, 꾸미다, 속이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꾸민 것입니다. 이것은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사에서 가인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바로 이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라는 것입니다. 아벨이 하니까 샘이 나서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강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가 진정인지 아닌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들보는 한마디로 허영입니다. 또 다른 표현이 가능한데 구약성경에서 많이 나온 단어입니다.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됩니다. 신명기 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로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신앙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수록 아이들 교육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교회 나오시는 분 자녀들도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내 밀리고 있습니다. 자녀의 달란트와 원하는 것은 관계가 없고 부모님이 원하는 명문대를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하는 마음을 왜 이해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명분에 허영에 빠져서 외식하는 자와 같이 자녀를 키우지 않아야 합니다.

아들 3형제를 불러놓고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그 대가로 승용차 한 대씩을 사주겠다. 자신이 있는지 자기의 의향을 말해봐라.”
그러나 고등학교 다니는 맏아들이 말했습니다.
“약속만 꼭 지켜주신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음에 중학교 다니는 둘째가 말했습니다.
“스무 살은 곤란하고… 한두 살쯤 줄여줄 수 없어요?”
낙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꼬마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아버지 그런 말을 왜 진작 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있다는 조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위선이 아닙니다. 명분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을 원하고 계십니다.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인간의 허영이란 죄의 모습에서 기인한 외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께는 그래야 합니다.

3.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라(5절)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바른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칼빈도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무조건적인 판단의 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같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롬 2:1).

이웃에 대한 험담을 잘하는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단점을 먼저 들춰내 헐뜯어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친정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아낙네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을 해댔습니다.
“저기 봐요. 옆집 빨랫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러워요. 세탁을 엉터리로 했나봐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자세히 봐라. 이웃집 빨래가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다.”

유리창을 닦으면 제대로 보입니다. 들보를 빼면 밝히 보입니다(5절). 밝히 보면 형제의 눈속에 티까지도 빼내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되는 장면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죄를 사함 받아야(죄를 제거해야) 남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죄를 사함 받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 앞에 무릎 꿇음으로, 순종함으로 내 고집을 버리고 들보를 빼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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