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 오직) / 본문 : 누가복음 4:24-30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래 전에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오르간은 펌프질을 해서 연주를 해야됩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뜻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날 설교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설교하는 저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본문 4장 18절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고 4장 22절에 그 반응이 나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은혜로웠습니다. 요즘 설교학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이쯤해서 예수님의 설교는 마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흥미와 관심이 고조되었고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시지 않고 더 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부분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얻으셨던 관심과 은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떨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내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인기나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말씀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것은 받으면 생명이요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6번만 나옵니다(12:37, 18:17, 29, 21:31, 23:43). 그만큼 이 말씀의 중요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전 엘리야 때에 있었던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때에 있었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야와 사렙다의 한 과부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몇 년(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날아다 주는 빵과 고기를 먹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릿 시내도 말라버렸습니다. 이 때 다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8절). 시돈 근처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머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밧에 성문에 머물러 있는데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자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체 불러서 물 한 컵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자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염치없게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갔다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과부인 여자가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밀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뿐입니다. 지금 나무를 줍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내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이 음식을 마지막으로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엘리야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아들하고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와 아들이 먹을 마지막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칭찬하신 과부의 헌금하고 어찌나 똑같은 지요(막 12:42-44).

엘리사와 나아만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 소녀하나를 잡아온 것입니다. 이 소녀를 나아만은 자기 집의 시중으로 있게 했습니다.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에게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왕에게 고하고 왕은 은 십 달란트(340킬로그램)와 금 육 천 개(약 68킬로그램) 의복 열 벌과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찌 나병을 고칠 수 있겠냐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미를 찾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옷을 찢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전차와 식솔들을 데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은 나와 보지도 않고 문 앞에 서있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며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 집 대문을 떠나며 말하기를 자기가 사는 지역 다메섹에도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더 나은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도 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부하가 말하기를 ‘만일 선지자가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더 어려운 부탁을 해도 장군은 병을 낫기 위해서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단강에 몸 일곱 번 담그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다시 돌이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알았나이다.’(왕하 5:15)”고 고백합니다.
나아만 장군도 믿음 없이는 못할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당히 쉬워 보이는 일인데도 못합니다. 설마 하면서 안 합니다. 여러분! 평생 살면서 주일 만 이라도 성실하게 지켜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선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인데 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까요? 이미 구약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본문에서 두 절에 똑같이 ‘오직’이라는 말과 ‘뿐이다’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두 내용 모두 오직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사렙다에 사는 과부도 이방인이며 나아만 역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선포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이방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방인인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말도 하지 않고 이방인을 위해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심으로 자신 또한 이와 같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 뿐이다.”, “너를 얻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던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하기를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란다”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 오직 예수님 뿐이다.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안 해도 누가 하겠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만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이 엉뚱한 데로 가면 안됩니다. 어떤 교인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남의 집을 들이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차는 하나도 망가지지 않고 그 집만 망가졌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하루종일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망언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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