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본문 : 누가복음 7:24-30, 렘 1장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올해(2005년) 명절은 추석이 주일이고 크리스마스가 주일입니다. 그리고 2006년 신년이 주일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억울해 하십니다. 쉬는 날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가야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질문으로 할까요.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께 두 제자를 통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질문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4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자문자답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심리를 다 읽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도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말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를 많이 질문 하셨습니다. 모세를 택하실 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시면서 손에 든 지팡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아모스, 스가랴 선자들에게도 “무엇을 보고 있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12)고 먼저 질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왜 먼저 보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30평 아파트입니까? 로또 복권입니까? 어떤 목사님이 20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교회를 짓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시대를 바라볼 줄 아는 영적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 말로 솨켓트 인데 이 뜻은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삼국유사에 보면 살구꽃을 보고 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구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로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와 가뭄에도 잘 견디며 100년 이상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1:7-9 “7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을 분명하게 믿는다는 증거로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시에 북 이스라엘은 B. C 721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고, 강력한 앗수르는 바벨론이 멸망시키고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더욱 악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세상에 보이는 세계를 구별하고 인식하며 보게 하는 눈입니다. 지식의 눈은 배움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눈입니다. 영안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의미의 말이 72번이나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는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듣고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 똑똑히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만이 영안이 열리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번째 “끓는 가마를 보았나이다”(렘 1:13)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끓는 가마가 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당할 심판을 끓는 가마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었다는 것은 북방에서 오는 세력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바벨론 입니다.
남 유다가 왜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우상을 만들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3차에 걸쳐 공격을 받고 B. C 586년 비참하게 멸망당하여 70년간 바벨론 포로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긴다면 재앙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인데도 미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멋있게 대답하면 좋겠지만 여러분에게 그것을 부탁드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쉽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레미야 것을 우리 식으로 조금 벤치마킹하자면 “개나리를 보나이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개나리는 살구꽃과 마찬가지로 입이 나기 전에 꽃이 피며 봄에 제일먼저 피는 꽃입니다. 개나리는 추위와 공해에도 잘 견디며 씨로 번식하기도 하고 꺾꽂이해도 잘 자랍니다. “개나리처럼 빨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잘 번식하며 추위와 공해 속에서도 잘 자라겠습니다.”

본 자만이, 깨달은 자만이, 비밀을 아는 자만이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데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을 모르는데 무슨 비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을 구경하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를 보려고 갔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출 4:16, 사 1:24, 렘 1:1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왜 주앙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 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26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은”(페릿소테로스) 비교급으로 “더욱 풍성한, 더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좀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요한이 직접적으로 물은 “당신이 오실 메시야 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모호하게 대답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메시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메시야 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시며, 대제사장도 되십니다. 단순한 메시야 하고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봅니다. 어떠한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의 주님의 바라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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