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씻기는 선생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6. 발을 씻기는 선생) / 요 13:12-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중세 어느 수도원에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원장은 어느 수도사에게 오늘은 당신이 설교하라 갑자기 시켰습니다. 무척 당황한 수도사가 강당에 올라갔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아무도 알리 없었죠, 청중들이 모릅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내려왔어요.
수도원장이 화가 나서 다음날 또 갑자기 시켰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가 올라가서 전날과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이 오늘은 “예. 압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 하러 설교합니까?”
수도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다음날 또 시켰습니다. 수도사가 올라가서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그제 속았기 때문에 청중 절반은 예, 절반은 아니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말하길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이 우리 수도원에서 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설교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표어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는 자가 희생하고 섬기면 모르는 자가 배우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가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 먼저 깨닫는 자가 섬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적인 선생 허락
예수님은 마태복음 23:8-12절에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선생(랍비)들은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을 즐기고, 잔치 집에 가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선생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예수님은 당시 선생(랍비)들 하고는 달랐습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쳐주고 이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 19:16) 어떤 사람이(율법을 잘지킨 유대인)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마 22:16) 자기 제자들(바리새인)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요 3:2) 그가(니고데모-로마관원)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막 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막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문 13-14절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주요, 선생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을 씻기신 것을 전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선생이 되려고 한다면 남의 발을 먼저 씻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지 주인이 어떻게 종의 발을 씻어줍니까? 지금 식으로 한번 이해해 봅시다. 운전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운전기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어야지 주인이 나가서 운전기사 문을 열어준다면 이해가 되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대접받고자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말하는 자칭 교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싶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이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선생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은 25불을 자기고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은커녕 당장 먹고 지낼 돈도 없었습니다. 누가 버린 헌 자동차를 집으로 삽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는 점심을 싸갈 수도 없었습니다. 일꾼들은 나무 밑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마틴은 배고픔을 달래며 혼자 그늘 아래 누워있었습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감독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젠장 이놈의 마누라, 나를 코끼리로 아나봐, 혼자서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이봐 누가 샌드위치와 케익 한 조각 먹어주지 않겠나?”
마틴은 기꺼이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감독은 계속해서 마누라 음식을 허비하는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마틴은 오히려 그로 인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틴은 보름이 지나 금료를 받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사무실에 들렸는데 사무실에 감독은 없고 여 사무원만 있는 겁니다. “감독님 들어오시면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독님 부인에게 센드위치 잘 만드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무원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감독님은 시내에 잇는 조그만 모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부인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발을 씻어주세요.
1) 발은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깨끗한 것은 만지고도 싶고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발은 신체 중에서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더러운 곳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잘해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을 사해주는 것입니다.

2) 발은 신체의 제일 끝입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의 움직임으로 피를 전신의 구석구석에 보내는 작용을 하고, 심장에서 가장 먼 발은 그 움직임으로 온 혈액을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요즘은 문명의 발달도 교통수단도 많이 발전을 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덜하게 되면서, 발의 피로를 느끼고, 발이 차가워지며, 다리의 부종이 비만이 되고, 혈행의 장애로 관절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 발은 돌아다닙니다.
발은 가만히 있으면 병 생깁니다. 가능한 한 자주 움직여 주면서 피를 다시 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절도 운동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종을 시켜서 발을 씻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직접 손님에게 발을 씻어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선생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가장 훌륭한 제자 훈련은 백만 마디의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직접 삶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케냐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한국 선교사님들은 너무 도시에 있으면서 부족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도 안돼 지만, 부족에게 가는 분이 드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들은 시간만 있으면 부족마을에 간답니다. 신학교를 도시에서 하지만 학생들 집에 방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왔는지 방문해서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학생의 생활을 이해하므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종엽이네 집에 방문했지 않습니까.
발로 뛰고 돌아다니다 보면 일이 됩니다. 지난 화요일(2005.5.10) 전세계 생물학계가 흥분하는 놀랄 만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미대륙과 유럽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알려진 허파 없는 미주 도룡뇽(lungless salamamander)-한국명(이끼 도롱뇽)이 한국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지난 5일 영국의 과학 전문지인 ‘네이처(Nature)’ 논문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도롱뇽은 꼭 도마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아마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십니까?
지난 2003년 4월 대전 장태산 야산에서 기독교계 대전국제학교의 미국인 과학교사 스티븐카슨(Stephen J.Karson)씨가 학생들에게 돌을 뒤집어 어떤 생물이 살고 있나를 관찰하도록 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카슨교수는 이 도롱뇽을 UC 버클리 대학의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W. 웨이크박사에게 전했습니다. 웨이크 박사는 허파로 호흡하는 아시아 도롱뇽과는 달리 혀, 발목, 두개골을 가졌고 특히 허파 없이 피부 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발견은 놀랄만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생물지리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끼 도롱뇽은 한국 내에 최소한 16군데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게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인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쯤이면 한국도 이러한 생태계조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수는 발견을 못하고 왜 미국 교수가 발견을 했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가르치고 미국 사람들은 발로 뛰면서 현장 교육을 하는데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알아서 교과서 잘 만들어 놨겠지? 이것만 잘 가르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발로 뛰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천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운동도 해야하지만 몸으로 해야 합니다. 저도 다음달에 러시아와 동유럽 선교지를 방문하는데 제 자신이 보고, 배우려는 목적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면 한국에서 자란 우리하고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2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성장한 분들은 자기 것을 오픈하고 사역한답니다. 그런데 한국 분들은 감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답니다. 개가 짓는 이유는 자기가 겁나니까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섭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도적질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똥개는 주인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짓습니다. 그러다 주인에게 한 대 맞지요. 수준이 비슷하면 싸웁니다.
자기가 자신이 없으면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사람은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이 물어보지요. 그 때 내가 아는 문제면 나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하지요. 그런데 모르면 꼬리 내리고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 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시 보냄을 받는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육체적 질서로 보면 절대로 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경우 없고 건방진 자식들은 부모님이 나이 드시고 힘없다고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집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아는 것이 부족하지만 부모님은 부모님이십니다. 아멘.
인천에 가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인천제이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48년에서 시작한 교회인데 김덕수 전도사님이 개척해서 1951년 이승길 목사님이 부임하고, 1957년 이삼성목사님(77년 총회장)이 부임하고, 그리고 지금 이건영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의 자랑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교육자 전원이 은혜롭게 은퇴하고 후임목사가 원로 목사님을 잘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후임자 문제로 고심하고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현재 이건영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목사님이 정해주시면 90%는 따르겠다고 말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교회의 목사님들이 섬기는 자세로서 먼저 성도가 아니라 원로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잘 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뒤집어 업고 다시 시작하고 잘 해보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해 놓으신 분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빨리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함께 기도하며 서로 섬기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2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빌라도의 손을 씻었던 대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던 대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고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회피의 대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야는 사람을 섬기고 더러움을 씻는 대야였습니다. 섬김의 대야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섬김의 선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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