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려거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3. 나를 따라오려거든) / 눅 14:25-33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현세적 축복을 갈망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기적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등극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무리들과 같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선택하면서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것인데 제 설교가 지나치게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는 무거운 설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합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결코 무거운 멍에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살아갈 때 신앙생활은 더 힘든 것입니다. 주님은 현세적 문제만을 보고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돌이키사 이르시되”(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중인데 예수님은 “돌이키사”라고 했습니다. 진행을 정지시키시고 제동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왜 따라오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두 비유로서 표현하셨습니다.

1.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집을 짓는데 집을 다 짓도록 그 비용을 계산을 하지 않고 짓다가 기초만 짓고 집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시작은 용처럼 거창하지만 나중은 뱀처럼 별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슷한 것입니다.
요즘 사이버 세상에서는 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집은 짓다말면 보이는 것이라도 있는데 소프트웨어(프로그램)는 하다말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지식 정보사회로 불리는 요즈음은 보이는 사회(하드웨어)보다 그런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엄청난 프로젝트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하다말면 그야말로 안한 것 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잘 할 수 있는지, 끝까지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느라고 요즘 잠을 못 잡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일만 시작하려고 기도합니다.

2.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위의 집을 짓는 비유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판단을 잘못하면 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1만 명의 군사이고, 적군은 2만 명의 군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빨리 화친을 청해서 무고한 군사를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비유의 목적은 ‘바른 판단’에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적이 많기 때문에 항복하라든가 아니면 적과의 싸움이 선과 악의 타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라”(되지도 않을 일은 처음부터 뜻하지도 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따라오다가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끝까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끝까지 보고 잘 판단해서 마라톤과 같이 골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미워하지” misei’(미세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큰일납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면서 비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미워하지”(미세이)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성장하면 친구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제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면 남편을 아내를 자식들을 제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무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할 때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바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져야할 것이라면 져야합니다. 우리사회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도 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지고”에 해당하는 ‘bastavzw(바스타조)는 요 19:17에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참다, 운반하다”라는 뜻과 함께 동시에 “영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우연히 TV을 보다가 좋은 영화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중간에 보아서 정확한 뜻은 잘 파악을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다가운데 있는 작은 원주민 마을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한일도 있었고, 처음에는 부족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나중에 선교본부에 사람이 나와서 이 사람이 한일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사람을 부릅니다. 순종하고 돌아가는 데 잘 아는 다른 가까운 책임 있는 원주민에게 본부에서 ‘유골함’을 준비해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선교사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이곳에 담아서 본부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3.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시점에서 듣는 무리들은 ‘잘못 따라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 곳에서나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자 되려면 들어야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를 놓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은 특별히 제자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이 제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 때문에 못나오는 분들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헌금’을 강조해서 믿음이 없는 분들을 좇아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헌금’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다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남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한 것이라고 믿고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와 같이”는 두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두 비유는 바른 판단을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는 비유입니다. 비유에 대한 결론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바르위크 마을에 사는 한 씩씩한 소년이 은행 창구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은행에 돈을 저축했으면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은행 직원은 소년이 마을의 감리교 교회에 나가는 신앙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구나. 존, 얼마나 저축하려고 하지?” “4달러예요.”
“그럼 통장은 네 이름으로 만들어 줄까?”
“아니 예요, 아저씨, ‘존 예이츠와 그의 친구’라고 해주세요. “소년의 말에 은행 직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존의 친구가 누구지?” 소년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에요, 저는 오늘 아침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이제 이 4달러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저는 단지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에요.”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뜻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 목회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큰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신의 소유욕이 지나쳐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큰 사람 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 이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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