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4. 어린이의 나라) / 막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여러분! ‘어린이 날’이 좋을까요? ‘어린이 나라’가 좋을까요?
어린이날은 하루이지만 어린이의 나라는 매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많은 장난감도 없었습니다. 몇 안 되는 장난감들이기에 소중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는 깡통, 고무줄, 돌맹이, 그리고 막대기가 전부였습니다. 고무공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런 것만 있다고 불만을 느끼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몸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타기입니다. 그래도 친구들과 날이 어두워지도록 놀았으니 불만이 있을리 없습니다. 빈곤했던 시대이지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불쌍합니다. 어린이날은 있는지 모르지만 어린이 나라가 아닙니다. 어른들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1. 어린이를 자유롭게 하라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는데 막으면 안됩니다. 이들이 비록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린이들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어린이들에게 사용된 원문 ‘파이디아’는 6-14세 정도의 어린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야이로의 12살 된 딸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행본문인 눅 18:15에서는 갓난아기를 말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더 어린아이들로 본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갓난아기에서부터 10여세가 된 좀 큰 아이들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유대의 랍비들에게 비추어 보면 결코 잘못된 행동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제자들의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이 당시의 일반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당히 화를 내셨습니다. 14절 “분히 여겨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제자들이 반대되는 행동을 임의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용납하고”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하고 싶은 데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정도는 아시겠지요. 지금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 강습회 때 가끔 강사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교육시키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이들은 혼을 내야합니다. 하지만 만사에 아이들을 쥐잡듯 잡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일시적으로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자유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한한 창의성과 긍정적인 생각들이 나옵니다. 지나치게 어른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어린이들의 입장과는 관계가 없는 학교가고, 학원(영어학원, 태권도학원 등)가고 바쁘게만 지내는 것은 어린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이 생각할 때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외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에게 자유를 주세요? 그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오늘본문의 시작은 엄마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왜?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까?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정의 문제, 우리 아이의 문제, 질병의 문제, 모든 문제가 예수님이 만져주시면 해결됩니다. 우리교회도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것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한번 해야겠습니다. 어떤 교단이나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픈 곳이 있으시면, 또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그곳에 손을 얹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 것을 믿으세요. 비록 내 손을 얹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육체의 질병 주님이 만져주세요. 주님 만져주시면 깨끗이 치료될 줄 믿습니다. 아멘”
마태복음 9:20-22에 보면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생각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만지는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갔습니다.
“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의 첫 이적사건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혼인집에서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 일이 왜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가정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세 곳에 계셔야 합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내 마음속에 둘째, 우리 가정에 셋째, 성도가 함께 모인 곳 교회에 이것이 교회의 삼위일체입니다. 어떤 분은 보이는 교회에는 잘 나옵니다. 그런데 가정에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바로 인도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만져주십니다.
어떤 분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니까 수도원쯤으로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끔 특별한 분이 있기는 하더라구요. 너무 영적이라 제가 아는 한 분은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어떤 수도원에서 수도원생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수도원에 들어가 탐정해 보았더니 그 수도원 원장이 너무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분이어서 하루 종일 도무지 웃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입니다. 웃으면 벌을 받을 만큼 엄격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수도생들이 오히려 병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질식됩니다. 인간미가 넘치고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그것이 용납되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감싸주는 가정이 오히려 건강한 가정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라
본문 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단코”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충 하는 척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단코”는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입니다. “받들지”에 해당하는 원문은 “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환영해야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어린이의 장점은

1) 단순합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좀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계산적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봉사를 하며 어떤 모임에 참석을 할 때도 항상 이것 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인가 계산을 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수지계산을 맞추어 보고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합니다. 그만큼 어른의 세계는 이해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세계는 다릅니다. 자기가 좋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과 형식이요 위선입니다. 제 이야기라 좀 그렇습니다만, 베트남에 선교사로서 제일 처음으로 들어간 김영관 선교사님 부부가 계십니다. 이분이 저만 보면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저는 단순하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저는 참 단순한 사람입니다. 복잡하면 계산을 못합니다.

2) 어린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참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어른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왜 코는 하나인 데 눈은 두 개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냐 등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부모는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고 야단을 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포기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신비롭게 세상을 바라보세요. 봄이 되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파랗게 새 싹이 나고 푸르러 지잖아요. 제가 여기 있는 화분 죽이고, 밖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은 하나도 안 죽이시는데 우리는 여기 있는 나무 두 그루를 죽였습니다. 자연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다 잘 산답니다. 그런데 사람이 손을 데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가슴이 뛰는 것은 남녀의 사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신비하고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3) 정직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거짓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원래는 거짓말을 모릅니다. 가끔 어린이들이 너무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캐나다에 있는 목사님이 아들하고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만 방구를 ‘뿅’하고 낀 것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권사님이 목사님 아들 엉덩이를 치면서 “이놈 방구 소리도 크네”그랬는데 목사님 아들은 말을 이제막 하는 수준인데 “나 아녜요! 나 아녜요!”하는 겁니다. 제일 잘 실수하는 것이 전화에다 대고 “엄마가 없다고 그러 라고 그래요”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어른들이 거짓말을 가르쳐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가 몇 년전 이런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지갑에 50불씩 넣고 주소를 써넣은 다음 1000개의 지갑을 세계 여러 도시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 나라 사람들이 정직하게 그 지갑을 돌려주는가? 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100% 돌려주었습니다. 싱가폴은 90%, 한국사람은 70%를 돌려주었습니다. 꽤 괜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 감사할 일입니다.
미국은 68%, 독일이 48%, 러시아는 43%, 필리핀이 40%, 이태리는 35%, 중국은 30%, 멕시코는 21%가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태리나 중국이나 멕시코 가서는 지갑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뒤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잘 살펴보았다. 또한 돌려주는 사람들은 만나 인터뷰도 했습니다. 어떤 스위스의 한 어머니는 그 지갑을 아이가 주어서 어머니에게 주자 그 지갑 속에 돈 50불 짜리를 얼른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한국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말하면서 신앙인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이 이렇게 되면 한국사회가 달라지고 변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가끔 한국서민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만원 짜리 내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아줌마가 뛰어나오면서 거스름돈 받아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외국인들은 가끔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기업들이나 정치를 보면 거짓이 판을 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의외로 한국사회는 특히 서민사회가 더 정직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4) 어린이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어린이는 과거가 없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미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삶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입니다. 노년은 과거에 살고, 장년은 현재에 살며, 어린이는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항상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도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만 향해 나가도록 강조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항상 새벽을 바라보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진 것처럼 현실화해서 살아가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앞당겨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즉 소망 중에 바라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4. 어린이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
저에게 여기서(주앙교회에서 지금) 한 사람에게만 축복하라면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헌금 제일 많이 하신 분? 아닙니다. 최서은(7개월 된 아기)이에게 할 것입니다. 불만 없으시죠? 왜 그렇습니까? 제일 어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제일 많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축복을 해 주면 제일 해주고 싶은 어린이들 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날을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입니다.
본문 16절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장면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평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축복하시니라”는 평범한 축복하고는 다릅니다. 원문에 ‘kateulovgei:카튜로게이’는 ‘뜨겁게 축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kajta;:카타’라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집중적인 힘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축복은 어린이에만 아니라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 율법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천국이 바로 그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태리 나폴리의 어느 공장에서 잡일을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에게 ‘너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공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소년은 너무 낙심이 되어 알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격려했습니다. ’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 매년 네 음악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좀더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보자’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음악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수년이 지나간 어느 날, 그는 수많은 관중이 모임 무대 위에서 감격에 넘치는 노래를 부리게 되었고 수천의 관중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관중 한 구석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이 누군지 아십니까가? 20세기 초대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연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한 신부가 미사를 집례하면서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빨리 꺼져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고의 독재가 ’티토‘가 되었다. 그러나 한 신부는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가 자라서 유명한 TV설교자 ’풀톤 쉰‘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축복도 한 어린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린이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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