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신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8. 다 이루신 사랑) / 요 19:28-30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속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보다 자식이 죽은 것이 가슴아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효 중에 불효가 부모님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귀 암으로 17년 동안이나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귀 암은 암 덩어리가 바깥으로 돌출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켜보는데 자식이 아닌 부모님이지만 정말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한가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저 아프지나 말고 하나님 편히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저희 어머님 장례식 중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감사헌금을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그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기 암 환자는 마지막에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을 저는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 하나님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들어주셨으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실 때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곳을 지나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스스로 죽이셨으니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눅 23:44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라고 했습니다. 마 27:51에는 땅이 진동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이 모진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 후에”라는 접속어를 사용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 시간에 공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한 사건(마 27:29-44)과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눅 23:40-43)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내용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조롱소리,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 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다 이루었다”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게 살펴봄으로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세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육체적 고난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고난받는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 고난의 대표를 뽑으라면 욥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도 예수님의 고난하고는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께 그 믿음을 시험하려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욥의 나중은 고난 전 보다도 더 많은 축복으로 끝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또한 고난을 받은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그의 기력이 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고난이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해 내기 위한 고난과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마지막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받는 고난은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위반하며 심지어는 율법을 폐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가 필요 없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안식교나 유대교를 이단시합니까? 그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에 매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만으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우선 순위를 정해두는 것이 연구 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율법 중에 먼저 지켜야 할 것과 나중에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해 놓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 22: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크니이까?”는 “어느 것을 먼저 지켜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제일 된 계명은 실천적으로 말한다면 부모의 장례였습니다. 시체는 부정한 것이고 장례는 모든 순위 중에 최고였습니다. 부모의 장례을 위해서는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되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다가도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장례가 최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렇지 않았습니다.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 즉 우선 순위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마침이 되시는 것입니다(롬 10:4).

3. 최후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가운데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미 그 때 사단은 자신이 처한 입장을 알고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로 굶주린 예수님께 빵(음식)으로 시험합니다. 세상을 자기가 다 줄 수 있는 것으로 위장하여 자신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높은데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은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따라다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들어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롱하며 시험합니다. 급기야는 가룟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님의 발꿈치 정도를 해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얻으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예배드리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와서 예배드리는데 어머님의 죽음에 슬픈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일 예배도 제대로 성수하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부모의 장례 우리가 치르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이 치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별다른 일도 없는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부끄럽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패배한 삶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에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원문으로 ‘파라디도미’인데 이 뜻은 ‘넘겨주다, 내 맡기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가상칠언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입니다. 이것은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돌아가시니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본문도 누가복음처럼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로 번역해도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난 토요일에 돌아가셨는데 저희 집사람하고 어머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편안히 모셔주세요.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셨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을 하고 났는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님 숨이 멈추셨습니다. 한때 저희 어머님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우신 것 같았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보이면 당신을 데리러 누가 왔나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있으셨습니다. 제가 그 때 “엄마! 엄마는 하얀 천사가 와서 모셔가기 때문에 절대 겁내실 것이 없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멘.

요한과 베티는 이제 갓 태어난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데리고 깊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 요한은 읍내로 장을 보러 떠난 뒤 베티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작더미로 같습니다. 그 때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뛰어 나오면서 베티의 다리를 물었습니다. 베티는 순간 장작을 들어 뱀을 내리쳐 뱀은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린 다리는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집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장에서 돌아오려면 최소한 1주일은 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베티는 부엌으로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어린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티는 1주일이상 아들과 딸이 먹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면서 네 살 된 딸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제 네 살이 되었으니까 네 동생을 잘 돌봐 주어야 한다. 엄마가 먹을 것을 만들어 놓고 엄마는 오랫동안 잠을 자야하니까 동생하고 엄마가 만들어 놓은 것을 먹으면서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해!”
그녀는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하면서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어져 갔지만 음식을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음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죽어야 될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베티는 “네가 살아있다니…” 몇 시간동안 음식을 만들면서 땀을 흘려 독이 혈관을 통해서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녀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립니다. 아멘.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 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을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 잡혀서 약 6만 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시보는 주기도문(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벽에 주기도문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루마니아 감옥에서 있었던 일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감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쳐 던져졌는데, 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갔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을 했다.
‘대위님, 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바람개비에 붙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느날 유명한 챨스 스필젼 목사님이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 놓은 바람개비가 있어서 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꼬리에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