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7. 예루살렘 입성) / 요 12:12-16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가시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황금마차를 타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군마 정도는 타셔야 어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나라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탑니다. 만일 대통령이 티코(소형자동차)를 타고 나타나셨다면 사람들이 과연 대통령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반대로 대통령 부인이 값싼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는데 그것도 어린 새끼나귀입니다. 예수님의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시는지 모르지만 어린 나귀는 고생 좀 했을 겁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김능수 전도사님이 제주도에 신혼여행 갔다가 조랑말을 탔는데 그분이 좀 덩치가 있거든요. 조랑말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어서 불쌍해서 얼른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세상의 다른 왕들과는 달랐습니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왕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루살렘으로 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되십시다(마 16:24).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한번 언급되는데 바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어머니 마리아를 잊어버린 사건입니다. 눅 2:41-50에 나옵니다. 유월절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사람가운데 섞여 있었는지 예수님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을 몰랐습니다. 친족 중에 끼어있는지 알았습니다.
본문에 “명절에 온 큰 무리가”라고 나옵니다. 역사가들은 이 당시 예루살렘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로 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잃어버리는 일이 많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간 길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은 무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어려서 여러 사람들에게 붙임성이 있어 잘 지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선생들과 묻기도 하며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보낸 날이 4일입니다. 한마디로 4일 동안 성전에서 성경공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인이 되면 누구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12살 때부터 매년 예루살렘에 가셨을 것입니다.
공생애 사역초기에도 예루살렘에 다녀오셨습니다. 그 때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대략 20여 번은 예루살렘성전을 찾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많이 예루살렘에 가셨었는데 지금 예루살렘 가시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가셨던 것하고는 두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입니다. 베다니에 들른 것은 이곳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 보려고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요 12:9). 나사로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인기는 기적과 이적을 베푸신 고로 이미 유대지방 전체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기간이 3년이었는데 사역초기에 올라가셨고 한번은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여든 군중들이 이왕 예루살렘에 왔는데 예수님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모습을 보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마 21:7-8, 막 11:7-8, 눅 19:36)에 보면 더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본문과 같이 요약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누구의 입장을 더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요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공관복음에서 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요한은 이 사실을 크게 장황하게 펼쳐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군중들의 외침은 고난을 향해 가는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순간만큼은 군중들과 함께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아주 이번 기회에 밀어붙여서 예수님을 왕위에 앉혀놓고 자신들은 평소에 꿈꾸어 왔던 대로 영의정, 우의정이 되어 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비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송은 했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선민사상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요한이 또 한가지 이 사실에 대해서 축소해서 전하는 것은 바로 이 군중이 일주일만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소리지른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 바뀌는 이 사람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에 전개될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에 대한 사건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올라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한 구원이 무엇인지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 곧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찾으신 예루살렘입니다.
제가 동남아 여행을 패케지 상품으로 두 번 다녀왔습니다. 제돈 들여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회사에서 다녀오라고 해서 갔던 것입니다. 이때 다른 팀에서 오신 나이든 어르신들이 계신데 어디를 가면 그렇게 눈여겨보시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또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나이든 어르신들은 그렇게 눈여겨보실 수가 없어요. 언제 이곳에 오나 싶어서 그러신 것입니다. 다시 못 오실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과 수많은 병자들과 눈물 흘리며 죄악에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성도 헐릴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쓸쓸한 가을저녁 같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무거운 짐을 벗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어 이 예루살렘을 찾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부르짖는 군중들의 목소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산나 찬송하지만 얼마 있으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를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3일 길을 갑니다. 3일이면 흔히 사람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칼을 빼 들고 이삭을 치려하는 것을 보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3일 길을 가는 동안 변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 아브라함만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이삭은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왜 하필 나이었냐고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 9:7)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는 길은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만 지금은 그들의 입에서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왕에게 뿌렸던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이때 시끄럽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좀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눅 19:40절에 나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임의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15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공관복음에서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마 21:1-3, 막 11:1-3, 눅 19:30)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해당된 말씀인지 제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는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셨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해서조차도 이와 같이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처음 하실 때부터도 이미 당신의 십자가를 염두 해 두신 말씀이십니다. 공생애 초기에도 이미 마태복음 10장에서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10:38절에서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십자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왜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십자가형을 말씀할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스스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밀히 일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받았을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막 8:27-30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②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눅 8:54-56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③ 예수님의 형제들이 비밀히 행동하시는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요 7:1-5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어라”
④ 예수님은 유대지방에서 가능한 은밀히 활동했습니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은밀히 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는 공개적입니다. 한마디로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훈련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21:15-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했습니다.
눅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이 가르친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석에 말씀하시기를
요 18:20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할머니랍니다. 할머니는 도둑이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것 훔쳐가는 데 “야 이놈이 차라리 날 죽이고 가져가라”하면서 소리지르면 대책이 없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시는 예수님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의 한 창문 쪽 좌석에 어떤 젊은이가 매우 초조하게 앉아있었습니다. 특히 사람이 지나갈 때는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이봐 젊은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네.”
고개를 푹 숙인 젊은이는 경계의 눈빛을 띠고 노인을 처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노인의 따뜻한 눈길에 마음이 놓였는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파 회사에서 작은 횡령을 했는데 그것을 안 사장이 다른 회사의 기밀 품을 빼내 오는 것에 동행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가담을 했는데 그만 들켜서 경비를 사장이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자신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자가 되어 도망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노신사는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수는 없으니 자수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법정은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신사는 지금 나에게 한 것처럼 법정에서도 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노신사의 말대로 자수했습니다. 변호사를 살 돈도 없지만 노신사가 말한 대로 진실만을 고백하겠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소란스런 법정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기차 안에서 고백했던 노신사가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실을 말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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