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질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3. 피할 수 없는 질문) / 마16:13-17(막8:27-30, 눅9:18-21)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턴 사원입니다. 저도 이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오래 전에 이 사원을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입에서부터 이런 흥미 있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 주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정황 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니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오늘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종교나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없이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임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내용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든 형식과 허상은 그 내용과 어떤 관련이 되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한 질문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임할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지리설명과 서언 - 프리젠테이션 참고]
예수님이 오늘 질문을 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입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는 다른 곳입니다(행 10:1).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방 약 40km 지점으로 헬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약 345m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서 커진 마을입니다. 마을의 이름이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붙여진 이유는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라고 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헤롯 빌립’은 이곳에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더 만들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신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지역의 구약시대 이름은 ‘바알갓’(수 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 갓’은 ‘행운의 바알’이라는 뜻이고 ‘바알 헤르몬’은 헤르몬 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우상을 섬기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구약의 이름으로 보나 현재의 이름으로 보나 우상이 만연한 곳입니다. 깊은 산과 바다 근처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의 땅에 도착하셔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우상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절도 많지만 우상이 길가에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손바닥만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깔린 것입니다. 선교사님들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게 우상이 많은 곳에서는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서 믿음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르신 이름 인자
“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본문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자’라고 표현하셨는데 공관복음서에만 69번 나오고, 사복음서에는 81번나옵니다. 단 두 번(눅 24:7, 요 12:34)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가 신으로 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럼 당신이 사람이지 신이야?”라고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라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예수님은 먼저 객관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제자들은 ‘더러는 … 더러는 … 어떤이는’이라는 연결 어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메시야 이심을 알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는 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적 능력(눅 1:17, 80)을 행하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을 꾸짖고 선지자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상 19:10, 왕하 1:11, 말 4:5-6).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선지자입니다(렘 9:1, 14:17).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믿으세요.”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지, 그분은 좋은 분이야”정도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가 그런 양상을 보입니다. 힌두교의 신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으론 안됩니다.

주관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내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당시 12제자에게만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또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꾸며서 말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중심을 아시는 분에게 중심에서 나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삼상 16:7). 이 한마디의 말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에서 소리질러 보신 적 있으시지요.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소리가 질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 질문에 꾸며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예수님의 질문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인성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물론 조금 있다가 21절에서부터 보면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그리 마옵소서”하는 바람에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만 생각합시다.
여러분! 때로는 자녀가 다 지키지 못하지만 말로만 해도 부모는 고마운 것입니다. 자식이 지금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때가 되면 정말로 집을 지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아버님들은 그런 허풍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님들은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아버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자들은 별을 따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별을 따다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은 것입니다. “야 그걸 어떻게 따다주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라고 하면 그 남자는 그 즉시로 차이는 겁니다.
이런 얄미운 아들도 있습니다. 일곱 살짜리 철이는 금붕어를 몇 마리 키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났습니다. 결국은 철이 엄마가 금붕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데 지친 엄마는 하루는 철이에게, “금붕어를 내다 버리든지 누구한테 주든지 해라, 알겠니?”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슬그머니 나타난 철이가 엄마에게 직접 만든 카드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어머니께 귀여운 금붕어를 선물로 드립니다. 철이로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에 축복해 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래 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때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가 사용되었는데 아람어는 평상시에 제일 편하게 꾸밈없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고향 사투리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아람어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22:20절에 사용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도 아람어 “마라나타”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렇게 어르신들이 부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희 아버님 함자는 ‘헌’자 ‘국’자를 쓰십니다. 그래서 ‘헌국이 아들 영제’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틴이나 중동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이 “바요나”그러셨는데 그러면 시몬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가 아버지라는 뜻이니까 ‘요나’입니다. 히브리어로 ‘요하난’(요 1:42)이 베드로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이 뜻은 ‘비둘기’입니다. 즉 평화라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매우 친근한 의미도 있지만 천연적인 신분인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즉 갈릴리 어부의 아들로서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고백이 사람의 혈육에서 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무엇이 복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복입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닙니다. 제일 큰복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원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만 살아 계십니까? 예수님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곧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서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나 글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일찌기 비상한 위험과 공포에 직면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때, 기운 없이 멍청히 앉아,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비비드! 비비드!” (vivid! vivid! –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 계시다!) 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이고, 인류 전체의 희망입니다. 고난 속에 빠졌어도 선지자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비비드”의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내과의사 출신으로 영국의 청교도 출신의 후예로 1940년대에 활동한 목사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가지고 설교한 목사님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한번은 이분이 웨일즈 지방에서 설교하기를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바닷가로 피서 가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가족이 죽었을 때 교회로 오시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왕 교회에 다닐 것이면 확실히 구원의 은혜를 받으며 다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한다고 여러분이 보이지도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줄 모르는 분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돈이 제일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교육 시키는 것이 제일인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죄인임을 고백할 때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 알게 하십니다.
겸손할 때 알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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