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계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2. 양 계명) / 마 15:1-9, 막 7:1-1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양 계명’입니다. ‘두 계명’으로 하려다가 ‘양 계명’으로 했습니다. 중국동포들은 2천년을 양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2천년으로 말해야지 양 천년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럼 남쪽에선 ‘양팔이라는 말을 안 씁니까?’그러는 것입니다. 숫자가 계속해서 이어질 때는 ‘양’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수를 말하는 것이 맡고요, 단 두 가지나 서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양’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이라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경우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양 계명이 나옵니다. 7절에 ‘사람의 계명’과 8절에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두 가지의 계명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956년 5월 8일 조용한 영국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열 코트 극장이 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양편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쪽에서는 조소 섞인 야유가 튀어나왔습니다. 관객들은 찬, 반 양쪽으로 갈라선 것입니다. 왕관처럼 근엄했던 《타임스》지도 이 문제에 끼어 들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극이 아니면 좀처럼 거들떠도 보지 않던 런던 시민들로부터 이와 같이 튼 인기를 얻은 주인공은 무명 작가였으며, 삼류 배우에 가난한집 자식인 빈털터리 존 오스본 이었습니다. 《분노의 얼굴로 돌아다 보라》는 3막 5장의 희곡 한 편을 상연하여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결국 승리는 오스본의 것이었습니다. 이 날을 오스본의 날로 재정 된 것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안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분노를 터뜨린 날입니다.
극중에서 런던은 지저분하고 음산한 독특한 스모그에 더러워진 노후한 건물들이 노출되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자욱한 안개와 같은 영국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은 교양과 신사도, 체면을 그 안개로 감춘 것입니다. 위장한 것입니다. 거짓이요 위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8세기의 스크리블러스 클럽 문인 회원들은 영국인의 위장과 위선을 풍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설들이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 포프가 쓴 《우물경愚物經》, 게이가 쓴 《삼문三文 오페라》과 의사였던 아버스넛이 쓴 《존 불의 역사》 등입니다. 존 불은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거세지 않은 황소’를 말하는 것인데 영국의 속물을 야유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영국인을 존 불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없이 근엄한척하고 살아가는 영국의 위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정도에는 비교되지 않는 진짜 위선자들이 나타납니다. 위선자의 원조라고 하면 지나칩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배경설명]
본문 1절에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입니다. 한마디로 서울에서 시골의 촌마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파견된 것입니다. 중앙에서 시골에 유능한 관리들을 뽑아서 보낸 것입니다. 이들이 왜 파견되었을까요? 이미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중앙에 보고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경쟁 상대로 보고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쟁상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빌미가 될 수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 중에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에게와 중동지방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결 예식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더러워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 몇 명이 어째서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고한 척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하고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수도에 사는 깨끗한 사람들하고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더럽고 싶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의 특징상 바닷가에서 살던, 어부들이 많은 예수님 제자들은 손을 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평소에 하던 버릇대로 떡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그렇지 무식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36년 올림픽에서 우수 민족을 자랑하던 독일이 미국에 패했을 때 나치스들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우리는 짐승과 경주해서 진 것뿐이다. 사람들끼리의 게임에서는 우리가 이긴 것이다.” 미국 선수들의 대부분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가해진 모욕적인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이런 촌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한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있을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5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말속에는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 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세 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6절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손 씻지 아니한 것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이들의 근본적인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어떻게 말해야 그나마 이해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약성경인용은 적대자들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시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실 만큼 당신의 진리가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이사야보다, 엘리야보다 훨씬 크신 분이며 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사야의 성경을 인용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해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납득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근거를 그들의 수준에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해외에서 본 것을 그냥 말하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 책을 보여주면서 말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하고만 있을 때는 구약성경에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구약성경에 있는 것만 말씀하셨다면 새 교훈이 아닙니다. 또한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것을 보여주니까 예수님께 달려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새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인정하는 선지자가 말한 것에 대해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야의 글을 인용하시기 전에 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25번 나오는데 복음서에서만 22번나옵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중에 마태복음 23장에만 7번이 나옵니다. 모두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외식”(外飾) ‘휘포크리테스(uJpokrithv”)’는 ‘연극배우’라는 뜻으로 자신을 속이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둘째,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자들입니다.
6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은 ‘구전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전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계명이외에 보다 상세한 율법이 적힌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더 이상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율법을 제 해석하고 문서화된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여 사회의 발전과 필요성에 맞추어 집대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탈무드’ B.C. 300-A.D. 800년 사이에 구전을 율법화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제1부인 미쉬나(Mishna:‘반복’이라는 뜻)와 제2부인 게마라(Gemara:’보완’이라는 뜻)로 구성된 것입니다.
탈무드의 내용자체가 모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 자체가 잘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더 본질적 문제로 접근해 가면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춥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자기 마음으로 춤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뜨거운 철판에 곰을 올려놓으면 뜨거워서 자연히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옆에서 피리를 불어 줍니다. 이러한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 곰은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놓지 않아도 조건 반사적으로 피리만 불어도 춤을 추게됩니다. 그러나 이 곰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서커스단의 곰처럼 구전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아무 감정도, 마음도 뜻도 없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유전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교묘히 피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르반’(코르반:하나님께 드림)이라고만 하면 그만이 되는 재산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출 20:12, 신 5:16절의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리고 출 20:12절은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부모님 잘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유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기 재산을 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코르반” 그 뜻은 ‘하나님께 드렸다’입니다. 그러니까 내 재산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위해서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상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일만 조금 잘 되게 해 달라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같은 말씀을 8, 9절에 연속적으로 하십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십자가를 잘라 주셨는데, 그녀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강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 삼아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걸치려 했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 없이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몇 일 있으면 우리 나라 최고 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날로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고 만든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법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유교에서 내려온 전통이든 어디서 생겨났든 관계없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마십시오. 죽은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 상을 차리고 절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유전을 따르려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우리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의 유전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만 적용하지 마시고 먼저 부모님에게 적용시켜 보세요. 올 설날부터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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