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6.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눅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틴 마틴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창 청년 때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들도 좋아하고 본인들도 좋아하여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첫아이도 낳기 전에 병들어 손도 써볼 여유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앞에서 울고 울다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아버지가 볼 때에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밤새도록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없이 어디론가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왔습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서있는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뛰쳐나갈 때 아버지가 뒤 좇아 온 것입니다. 구경하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붙잡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없이 묵묵하게 밤새도록 아들의 뒤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돌봐 주십니다. 우리가 정신없는 지경에 이르러도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따라와서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광경이 나타납니다. 누가는 죽은 사람이 12절에서 ‘그 어미의 독자’, ‘어미는 과부’라고 설명해 줍니다. 독자인 아들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이 여인에게 더 이상의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여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남고 말았습니다. 로마 압제하에 있던 이 당시의 여자들은 자기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면서 꿋꿋하게 살던 이 여인은 외로움과 슬픔 이외에도 혈통이 단절되어 혼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늘 한숨을 짓는 사람을 일컬어 ‘젊은 과부 한숨 쉬듯’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만큼 과부로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
성경은 과부에 대해서 특별히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슥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외식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또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2-44)
약 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은 과부의 독자가 죽은 딱한 사정을 그의 슬피 우는 울음소리를 통해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소리는 예수님만 들은 것이 아니며 예수님과 함께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리와 장례무리와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나타난 병고침이나 신유의 은사들의 대부분은 병자 자신이나 부모, 친인척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실 때는 누가 요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과 부딪힌 장례무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모두 그 원동력은 사랑이었습니다(마 14:14, 20:34). “불쌍히 여기사”의 원문 splagcnivzomai(스프랑크니조마이)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열정적 아픔’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측은히 여기시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괘씸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어려운 것 같으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눅 4:25-26에서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면 무조건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과부만 보면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악한 사람은 바로 그 과부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8:4-5 비유 중에서 “4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평소 관심이 과부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과부들의 사정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제일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독자가 죽은 나인성 과부의 울부짖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그의 아들을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함께 한 두 무리들에게는 돌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데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레 22:4, 민 19:11). 예수님의 이런 행동으로 상여를 메고 가던 자들이 멈춰 섰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은 세마포로 싼 시체에 뚜껑 없는 관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굴 같은 곳에 시체를 같다놓기 때문에 관은 이동할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시체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이외에 두 사람을 더 살리신 기사가 나오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눅 8:40-56)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요 11:17:44)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 밖에서 명령만 하셨습니다. 오늘 과부의 독자는 관(시체)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으로 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은 사랑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 되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외에 성경은 몇 번의 사건을 더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신 것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간곡히 부르짖었습니다(왕상 17:17-24).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시체 위에 거듭 엎드렸습니다(왕하 4:32-37).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체 앞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행 9:36-43).
죽은 자를 살릴 때 예수님과 선지자(엘리야, 엘리사)나 제자(베드로)의 방법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일어나라’ ejgeivrw(에게이로)고만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선지자나 제자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말합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죽은 시체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신 분으로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메시야 곧 하나님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롬 8:2, 고후 1:10, 딤후 1:10).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2:19, 요 24:36-49).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이란 싶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과부의 아들과 아이로의 딸과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과 아울러 자신도 부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 된 세상의 죽음에 지배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죽음이 지배할 수 없기에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또 언젠가는 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영생을 소유하려면 나인 성의 과부도 이제부터는 아들 제일 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들이 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어야 합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지금 살리시기 때문에 울지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여인이 또 울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장 불행한 경우의 반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살아나면서 제일 행복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아들만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 축복이 주어진 사람이 물질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에 샤르황제가 세상에서 도대체 행복한 사람 그것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그 당시 시인으로 굉장히 명성이 높은 따소라고 하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따소가 황제 앞에 섰습니다. “내가 한가지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거야 하나님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화가나서 “이 사람아, 내가 하나님을 물었나?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란 말이오” 이번에도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 않고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뻔한건가?” “가장 행복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샤르황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이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 같은 일에 참여할 수도 있고 목도 할 수도 있고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동행의 은혜가 즉 그런 체험의 은혜가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살리셨으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자식이 죽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와 현재 함께 할 수 있는 자녀를, 남편을, 아내를, 부모님을 보내주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혹 아무도 없어도 욥과 같이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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