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7. 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 눅 11:42-52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카톨릭의 이른바 면죄증(免罪證)에 대한 95개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그교회 정문에 마틴 루터가 붙임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날입니다. 현재 우리 개신교회가 로마카톨릭과 구분하여 지켜오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제일 큰 종교개혁을 주도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에센파, 사두개파, 바리새인(파리사이오이파)) 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신앙노선은 에센파의 숙명론과 사두개파의 자유 선택적 입장의 중간 노선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을 6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개혁한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도 예수님이 지적한 6가지 문제에 모두 걸려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지독한 욕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질러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독일 나치 같다고 한다든지, 한국에서는 일본인을 비하하는 ‘쪽발이’ 같다든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치욕스런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과오를 저질렀던 바리새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재점검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바리새파 사람이나 로마카톨릭의 잘못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하면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섯 가지 잘못을 지적하실 때 “화 있을찐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저주나 복수의 말이 아니라 oujai(우아이)라는 ‘슬픔의 탄성’ 소리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탄성을 하셨겠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뜻이 ‘분리’입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 카톨릭보다 잘 믿겠다고, 바르게 하겠다고 분리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보다 못하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바리새인을 보고 탄식을 질렀던 oujai(우아이) ‘화 있을찐저’라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이 탄성의 소리는 안타까움에 대한 소리입니다. 슬픔의 소리입니다. 우리를 보고 이 탄식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마음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화(외형적 신앙)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언 듯 보아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 잘못이지 십일조를 이렇게 잘 구분하여 드리는 신앙이 잘못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곡식, 포도주, 기름 같은 주요 농산물은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7:30-33, 신 14:22-29). 그리고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드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만 드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공의와 사랑”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사람들은 자주색에 가까운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국 시내 버스의 색이 빨간 색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빨간색을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체통입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해서 빨간색이 아닌 녹색을 우체통에 칠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체통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시 빨간색으로 칠했다고 합니다.
만일 여자들의 립스틱이 빨간 색이 아니라 녹색으로 칠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쳐다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빨간색이냐 녹색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편지를 넣는 우체통이라는 것과 그 입술이 빨가냐 녹색이냐 보다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일 것입니다. 전통과 습관은 때로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정한 규범들이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으면 안됩니다. 따라합시다. “형식에 빠져서 진실을 잃지 말자” 아멘.

두 번째 화(명예욕과 교만)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교권적 교만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변화 가운데 제일 반길만한 것은 예전에 교회 강대상 뒤에 높은 나무의자가 죽~ 놓여져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이 없어져서 좋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높은 단상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충실히 하기보다는 외적인 자리에 탐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늘 뒤에 성령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시고 인사하고 설교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주님이 바로 뒤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지키려는 것이지 그분의 이름을, 능력을 통해서 내가 높아지려면 잘못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입니다. 바리새인이 종교 지도자로서 문안 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사 받을 수 있도록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지적하셨습니까? 자신들은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Noke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위(胃)와 같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음식으로 그것을 채우느냐가 아니라, 안에 들어있는 음식을 얼마나 소화시키느냐가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회의가 있어서 목사님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오시고 다른 많은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긴 테이블인데 가운데 자리에 김삼환 목사님 자리만 따로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제가 왜 그곳에 앉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더 연장하신 분들도 있고, 목회의 선배로 생각할 수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김삼환 목사님은 그 자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주 대접을 받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생기고 당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의 목회철학입니다. “우리에게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세 번째 화(자신의 잘못을 은폐)
세 번째로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을 만들면 그곳에 표시를 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서 그곳을 밟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민수기 19장 16절에 보면 무덤에 닿으면 7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평토장한 무덤인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저는 오늘 로마카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설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들의 잘못으로부터 개신교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래새인이 안되려면 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태(마 23:27)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마태역시 외적 치장에만 열을 올리는 바리새인을 표현해 결국은 이 또 한 진실을 은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무덤에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까? 말라는 것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은 무덤일 뿐입니다. 그것에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습니다. 즉 나 자신 그대로를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결국 신앙적으로 포장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주앙교회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 않은 것을 한 것처럼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없는 시설을 있는 것처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포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한 신사가 길을 걸어가다가 맹인소녀가 동전 통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것이 불쌍하게 생각돼 지갑에서 1만원 짜리 지폐 1장을 꺼내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큰 액수에 놀라는 눈치로 지폐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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