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9. 나의 샘이신 예수님) / 본문 : 슥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더운 나라 사람이 조금 불쌍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겨울이 없어서 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열대지방 선교사들은 눈을 설명하느라 바쁩니다. 하늘에서 흰눈이 내려오는데 그것은 냉장고에 이슬이 맺혀 있다가 얼면 송이 얼음처럼 되는데 그것이 눈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솜을 꺼내 가지고 이렇게 생겼는데 그것이 얼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내리면 조금씩 시인이 됩니다. 백설의 눈을 보면 어린 동심으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은 무언의 동화 같습니다. 세상은 변해도 순수성만은 옛날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눈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흰 눈을 보며 ‘떡가루’를 생각합니다. 헐벗은 사람들은 ‘목화송이 같다’고 합니다. 저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설탕’을 연상할 것입니다. 감기걸린 사람은 ‘아스피린분말’로 영화 매니아들은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정도는 다 그래도 서정적입니다. 슬픈 것은 자동차 때문에 갈 길이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눈도 알고 보면 물입니다. 그런데 물 중의 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샘물입니다.

물 중의 물(샘물)
중국에서는 월급을 ‘신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무와 물 값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샘물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샘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누가 물을 퍼가든 안 퍼가든 샘은 끝임 없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샘으로 말한 것은 그의 은혜는 한이 없고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샘하면 먼저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 샘하면 그것은 곧 오아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물이라고 하지 않고 샘이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은 생명만 공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신 것이 물입니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를 보내실 수도 있으며 큰 강들을 말리실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겔 47:1, 슥 14:8). 심판과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물은 샘하고는 다른 물입니다. 일반적으로 물은 기상학적으로는 ‘구름, 안개, 비, 이슬’이라고 부르고 지리학적으로는 ‘우물, 시내, 수로, 호수, 저수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냥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샘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주로 오시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샘물은 오직 살리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샘이 사람을 죽이거나 심판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한의학을 다룬 드라마를 보면 물을 이른 아침 샘에서 기러오는 것이 약효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물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판하는 물이라면 홍수, 아니면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물은 샘물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는 물입니다.

샘은 생명을 줍니다.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민 8:7)라고 하나님이 일러 주셨습니다. 정결케 하는 것은 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구약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온전히 우리처럼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죄를 씻는 방법을 하나님은 일러주셨는데 그것은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워진 죄를 씻는 예식이며 예표인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22절에서 요셉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축복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것은 요셉에게 주어질 축복이었습니다.
삼손을 하나님이 샘을 터져 나오게 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이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합니다.(삿 15:19)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물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소중히 간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창 26:18-19)이 있었고 물 항아리(창 24:14), 물병(삼상 26:12), 수도(왕하 18:17), 물구유(창 30:38)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원의 모형을 ‘흐르는 시냇물’(겔 47:1)이 있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처럼 물이 귀한 나라에서는 늘 물을 저축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는 곧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이스라엘은 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갈급함을 모르면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도 갈급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질과 명예도 있지만 영혼은 갈하여 있음을 봅니다.

인도의 영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한번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야말로 인도인들의 계급차별 의식과 타락한 문명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자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무명옷을 두르고 피부색이 검은 간디가 교회 문 앞에서 간디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이 될 뻔했던 간디는 ‘진리는 좋으나, 교회가 잘못되었구나!’라고 한탄하고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언 10:11에서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편견과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갈함보다 영혼의 갈함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샘물을 해결하여 나와 및 많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샘은 더러움을 씻어줍니다.
중국의 북쪽 산족마을이나 네팔이나 유목민들을 보면 물이 귀하기 때문에 잘 닦지 않아 더러운 것을 봅니다. ‘사스’같은 질병도 왜 생기겠습니까? 한마디로 잘 닦지 않아 위생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잘 닦는 민족입니다. 처음부터 선진국형 국민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장면이 창세기 18장 1-9절에 나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이들을 맞이할 때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창 18:4)라고 했습니다. 무덥고 사막과 같은 이 지역에서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얼마나 피로를 풀어주며 행복감을 주는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대접에 얼마나 감동하셨으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사라에게 아이을 낳게 한다고 했겠습니까? 사라는 순간 하나님의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정결예식에서도 몸에 물을 뿌리든지 부분적으로 씻든지 아니면 전체를 물로 씻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희생제물의 각 부분들도 물로 씻었습니다. 이 정결 의식은 거룩한 백성을 삼는 상징적인 중요한 예식입니다(겔 36:25, 사4:4).
예수님도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겸손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때 베드로는 처음에 닦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닦지 않으면 나와 관계가 없다고 하니까 그럼 발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씻겨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발을 닦았으면 모든 것을 다 닦았다고 하셨습니다(요13:4-12).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세례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3-14).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옥합의 향유와 여인의 눈물로 발을 씻으셨습니다(눅 7:37-38). 이 모든 것은 죄는 반드시 씻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감추려 하는 것은 잠시는 가능할 지 모르나 영원히 묻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 해 전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국민의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이 세워질 때 이야기입니다. 개관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재원인을 조사하던 중 타다 남은 기념관 지붕에서 커다란 깡통이 몇 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그 지붕 속에 있는 깡통이 화재에 어떤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어 수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깡통은 인부들이 지붕마무리 공사를 하면서 화장실 가는 것이 귀찮아 일시적 대용품으로 사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아무도 볼 사람이 없을 것으로 여겨 그곳에 둔 채 기념관 지붕을 기와로 덮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죄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나 고백하지 않은 은밀한 죄는 언젠가는 들추어지기 마련입니다. 혹 세상에서는 숨기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고 했습니다.

샘은 성령축복을 말합니다.
샘물은 기본적으로 정화된 물로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깊은 땅속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물은 이미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생명을 공급할 준비가 된 물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오는 샘물은 사람을 살리는 영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사 41:18) 또한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고 했습니다.
이 샘의 기적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심으로 이루어지심을 알려주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8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은 성령이 샘입니다. 이것은 ‘깊은 산속 옹달 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배에서 흘러나온 보혈을 말합니다. 그 보혈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죄를 씻을 수도 깨끗해 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살리실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남태평양에 누라반디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에서는 남자가 결혼할 때 여자의 몸값을 암소로 계산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내를 암소와 바꿔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소문이 난 링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별로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잘 생기지도 않은 처녀를 암소 여덟 마리나 주고 데려왔습니다. 보통은 두 마리입니다. 사람들은 많아야 네 마리만 주면 되지 여덟 마리나 주었다는 것은 허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아내가 이뻐지기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다른 사람들이 처음 본 것과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링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 아내 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은 암소 2마리 정도에 해당하지만 이 신부는 여덟 마리를 주고 데리고 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지불하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의 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꼭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그 값을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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