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8. 나의 인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8:20, 단7:31

이름이란 후대에 많이 불려지던가 아니면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인자’라는 호칭만큼은 더 이상 불려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이름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는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된 호칭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인자(人子)의 칭호는 네 복음서 안에만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단 한번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에서 그가 숨을 거두려고 하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하였습니다. 이 칭호가 히브리서 2:6에 인용이 된 시편 8편 4절 말고는 어떤 서신에도 인자 칭호가 나오지 않습니다.
본래 인자(uiJo;” ajnqrwvpou:휘오스=아들 안드로포우=사람)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에서 처음 왔습니다. 이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을 때 ‘사단’과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아람어입니다. 즉 급하고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은 당시에 서민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외국분과 결혼하신 분이 있는데 이분들이 싸울 때는 급하게 하는 말이 각자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운 본토어를 가지고 싸운답니다. 즉 쉽게 나오는 일상적인 용어고 또 이 말이 편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도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용어는 어원학적으로는 사람이라고 하는 명사와 동등한 보편개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복음서의 맥락에서 이 인자가 사람과 같은 명사가 아니라 한정적으로 사용이 된 칭호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24에 나오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에 보면, 인자와 사람이 함께 나오며 혼돈이 없고 어느 것도 보통 사람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여 아람어의 인자는 보편적인 의미의 화자(話者)가 완곡하게 자기를 지칭한 대명사와 같은 용법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16:13에 “사람들이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7과 눅 9:18)하였습니다. 이 용법은 보편적인 사람이 아닌 특정인을 가리키는 ‘나’를 말하는 한정적인 것입니다. 즉 보편적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말씀하셨으나 이것은 예수님께 적용된 특수한 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언된 호칭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 7:13)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호칭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이 된 예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69회 나오고, 요한복음에 13회 나옵니다. 동일 문맥이나 문절에 반복이 된 것을 제하면 공관복음의 총계69회가 39회가 됩니다. 여기에 요한복음의 것을 추가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59회나 인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 호칭이 예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겠습니까? 만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를 가리켜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사용합니까? 그렇게 부르는 예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아들인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스스로의 겸손과 또 하나님께로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표현할 때는 이 용어는 적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야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가리켜 국민들에게 ‘저는 여러분들의 종입니다. 심부름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국민들은 대통령이라고 불러야지 ‘내 종아’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스스로는 하나님의 ‘종’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의 ‘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기도하실 때는 ‘종’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습니다. ‘목사’라고 물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기도하실 때 어떤 분은 우리 ‘종’님을 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실 때 말고도 목사님을 만나서 ‘종 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보통 때 목사라고 부르면 기도하실 때도 목사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은 하나님과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소개하실 때 ‘인자’라고 소개하신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는 59회나 직접 인자라고 사용하신 반면 제자들은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친히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미 하나님 나라의 경이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례 요한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3-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군중 속에 ‘인자’로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자이신 자신이 지상사역과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동일 인물이시며, 두 차원의 일치를 수용하여야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인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요한복음 14:9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하신 예수의 답변은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인자와 하나님 아들의 일치문제의 요약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여 인자로 사용한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사역과의 관련이 된 일련의 말씀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선언하신 경우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막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인자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마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친히 오신 목적을 설명하실 때 모두 ‘인자’라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 인자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관련이 된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스파르타(Sparta)는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통해 용감한 전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후퇴는 없고 전진만 있었기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 중에 그 어느 한 사람도 화살이 등에 꽂힌 자가 없고 앞가슴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하면 전진만 있는 엄격한 교육을 상징합니다.
스파르타 교육 중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짧은 검을 지급 받은 한 병사가 지휘관에게 자기가 가진 검이 너무 짧아서 전투에 불리하니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지휘관은 그 병사의 어깨를 잡으면서 “검이 짧으면 한 발짝 더 빨리 적진으로 전진하라. 문제는 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더 앞서가는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라고 교훈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소개해 주신 뜻에는 인간 세상 속에 오신 예수님의 비장함이 엿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자 오신 ‘인자’이십니다. 우리에게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고 하셨습니다.

셋째, 미래에 도래할 인자의 영광스러운 강림과 관련이 있는 말씀에서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13:36, 14:62, 마 24:27, 37, 39, 44)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고 하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도시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시몬즈라는 젊은이가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실신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며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골집 큰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재산은 많았지만 홀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기 싫고 시골에서 평생 산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값진 재물을 챙겨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동안 연락한번 하지 않고 어머님의 생사조차 모릅니다.”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폭우로 옷은 흠뻑 젖고 주위는 어두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산 속의 외딴집을 찾았습니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보니 대문 위에 등불이 환히 걸려 있었고 늦은 밤중인데도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방문 앞에 가서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뛰어나오시면서
“아니 이게 누구야! 시몬즈구나!”
어머니는 방문을 열어 젖히고 한걸음에 뛰어나와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어머니 이제야 찾아온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런데 제가 집에 있을 때는 초저녁부터 대문을 꼭꼭 잠그시더니 왜 이렇게 늦은 밤에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어요? 그리고 대문 위에 등불은 왜 켜 놓으시고요?”
“애야. 네가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난 하루도 대문을 잠근 적이 없단다. 날마다 네가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겠지 생각하며 등불을 켜놓고 대문도 열어놓았단다. 애야 잘 돌아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마음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실 것입니다.

인자는 하늘에 계십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반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도요한은 계1:13에서 환상으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도 하셨습니다. 즉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늘에 가 계신 것입니다. 이분이 가 계시다는 것은 우리도 그곳에 있게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로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던 분이셨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께서 인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초청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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