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0. 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1-11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에서의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대륙에 상륙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주(移住) 후,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첫 번째 추수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처음부터 감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사실 추수한 것이 풍족했던 것이 아니라 겨울을 나려면 어림없는 곡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이제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이 부족한 것으로 어떻게 겨울을 날수 있냐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한 소녀가 많은 사람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그 부족한 상태의 추수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곡식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그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 때였던 1789년도에는 11월 25일로, 1863년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추수감사절 날에는 전쟁을 쉬자’라고 제의한 링컨 대통령 때에는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지켜 오다가, 1941년 미국 의회에서는 11월 넷째 목요일로 지키자고 결의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시험을 받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서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욕심이 감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황소의 거대한 몸짓을 본 개구리가 황소처럼 되어보겠다고 바람을 마셔 배를 부풀게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고깃덩어리 하나를 훔친 개가 다리를 건너다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 고기를 빼앗겠다고 짖다가 그만 물고 있던 고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만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과 병자, 불구자는 감사하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이상하게 그분들이 더 감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농사짓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만 바라보다가 자신이 농사지은 것이 없어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고,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악착같이 노력하여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북사람이 부자가 많다고 합니다.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씨도 북한에서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내려왔던 분입니다. 미국에는 유대인들이 재계, 정계, 예술계의 중요한 위치는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교육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총학생수 16,700명 중에서 4,500명, 26.95%가 유대인이고, 예일대학교 총학생수 10,000명중에 3,000명이 유대인이며, 보스턴대학교 25,000명중에 5,000명이 유대인 재학생이 있습니다. 미국 6개의 명문대학의 20%을 유대인이 차지합니다. 자식 농사는 역시 교육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강태공도 “좋은 전답을 많이 가졌다고 자랑 말라! 그것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것보다는 적더라도 기술을 하나 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견고한 보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농사를 잘 짓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확실한 방법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주어도 그것만으로 추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비가와야 하고 햇빛이 비추어야 하고 밤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농사만를 짓던 시절의 풍습은 풍년이 되게 해 달라는, 사실상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지으신 아버지가 농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난주에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만일 시험문제를 낸 분이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묻는 제가 이상하지요. 당연히 100점 이상일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이면 이제 농사는 100% 보장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절대로 농사를 망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농사는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농사는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주인이신 그분이 농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부터 이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날씨가 맑고 늦여름 밤에 이슬이 내리는 기후이기 때문에 포도재배에 알맞은 곳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수세기 동안 자라왔습니다(렘31:5, 암9:13). 그런데 왜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참’이라는 말을 강조 하셨을까요? 참 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성경시대에 사람들에게는 번영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논 몇 마지기 가지고 있느냐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미4:4) 한것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말한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 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회복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 상품의 포도나무는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3),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하였습니다.
들포도는 머루와 같이 작은 알맹이의 포도를 말합니다. 아주 형편없어진 포도입니다. 이런 포도는 돼지나 들짐승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것은 영적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들 포도처럼 되어버린 하나님의 영혼들을 참 포도나무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대로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들 포도나무 같이 제멋대로 엉킨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더불어 쓸모 없던 내가 쓸모 있는 모양으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mevnw(메노) “거하다”의 이 단어는 오늘 본문 안에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알 수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가지에만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지만, 떨어져 나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가지는 잘라내는 것입니다. 과수원 농사를 해본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봄에 가지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잘 보존하여 열매를 더 잘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열매가 없는 가지는 잘라냅니다. 다른 나무는 목재나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데 반해 포도나무는 오직 포도열매를 맺기 위함이기 때문에 열매가 없으면 잘라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거할 수 있는 수액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이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붙어있을 수 있는 비밀은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고 하셨습니다.
지난 8월 영국에 갔을 때 브리스톨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시는 분이 차를 몰고 따라오는데 참 운전을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목사임은 ‘영국에 오신지 얼마 안 되는데 운전을 잘하십니다.’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저는 영국 길을 몰라서 그 때 목사님 잃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쫓아간 것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미 있는 두 가지 예식을 행합니다. 세례식과 성찬예식은 모두 예수님과 이제부터 하나가 되는 거룩한 성례식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우리이제부터 이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예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헬라어에는 말씀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로고스’와 ‘레에마’입니다. 로고스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이고 ‘레에마’는 로고스가 역사하여 내 안으로 불같이 들어오는 뜨거운 말씀을 의미합니다. 성경책에만 기록된 말씀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속으로 그 말씀이 찬란한 햇빛처럼 밀고 들어올 때, 바위를 깨뜨리는 빗방울처럼 스며들어올 때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대예배에서 헌금위원을 맡은 한 집사님이 헌금바구니를 돌리는데 초라한 차림의 한 맹인이 10만원 짜리 수표를 세 개나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깜짝 놀라 나중에 그 맹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라고 헌금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지난번 이 교회 사무원한테 한달 전기료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30만원 내외라고 하더군요 보시다시피 저는 소경입니다. 볼 수 없으니 전깃불도 필요 없죠 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육신의 어두움보다 훨씬 심각한 영적 어두움을 밝혀주는 교회사역을 위해서 조금씩 절약해 모은 돈으로 매달 그만큼이라도 하려구요”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모두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밖에 버려 불태워지는 가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있어 절로 열매를 맺는 축복된 가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