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8.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 본문 : 출12:13, 고전 5:7-8
“내가 애굽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유월절(逾越节)의 ‘유월’이란 말은 원어의 ‘페사크’인데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 즉 ‘넘어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이 절기는 니산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이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부터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습니다. 이 절기가 무교절입니다(출12:1,27, 레23:4-14, 민9:2-14, 신16:1-8). 그러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습은 세계 최고의 절기로 기억되어 남아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3천년이나 지켜온 절기로 이렇게 오래 된 절기는 세계에서 유월절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후에 유월절은 국가적 축제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중에 20세 이상 된 남자는 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 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일년 내내 유월절에 가기 위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습관화되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인 남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역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 중 제일 먼저 오는 절기로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로 이어집니다(출12:2).
유월절이 생겨난 것은 애굽 왕 바로가 9번째 흑암 재앙을 만나고 모세에게 양과 소 떼만 남겨 두고 다 가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짐승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쫓아내면서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림으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내듯이 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는 무서운 장자 재앙이 임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9가지 재앙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는데 이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이 마지막 재앙을 내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이 내릴 때에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통곡이 있을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바로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찌니라”(출12:13-14)
유월절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발랐습니다 천사가 그것을 보고 유월(넘어감)하였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유월의 ‘페사크’는 ‘지나간다, 넘어간다’의 뜻도 있지만 ‘용서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가 있는 집은 유월하신 것은 곧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나라 가운데 처음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1-13)
이 날의 밤은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는 긴 밤이었습니다. 장자가 있는 집들은! 아니 장자가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신,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다음 집으로 넘어갑니다. 만일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으면 그 집의 장자는 사람과 동물 모두 죽는 것입니다. 비록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있었다고 해도 뜬눈으로 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 날밤 애굽 전역 집집마다, 왕의 아들부터 종의 아들까지 장자는 모두 다 죽임을 당했으므로 집집마다 초상이 났습니다. 옆집에서 나는 죽음의 통곡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피해간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찌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세계최초, 최고의 절기가 된 것입니다.
둘째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430년 간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감격의 날입니다. 유월절에 해방된 것이 아니고 해방된 날을 유월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어린양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 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우리 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36년의 치욕적인 강제 통치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방 운동의 불씨를 집힌 3월 1일과 드디어 광복한 8.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입니다. 36년의 강제통치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430년간입니다. 올해가 루터가 개혁한지 486주년 됩니다. 우리가 그 때를 지금 제대로 기억이나 합니까? 사실 전해들은 이야기로 약간 알고 있을 뿐 잘 모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이렇게 오랜 기간을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된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셋째 언약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 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양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양은 흠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가다 해 질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묵을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3-7)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의 수효에 따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피 흘려야 되는 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 된 양, 가장 힘이 좋을 때 드려야 합니다. 가장 살이 찌고 완전할 때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씨와 힘을 상징하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미리 선택한 양을 14일간 두었다가 저녁에 잡았습니다.
죠세프스에 의하면 14일 해질 때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인 오후 3시에서 5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시뻘겋게 발랐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집집마다 피 색깔이었습니다. 이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야 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넷째 유월절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에 먹을 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에 그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8-11)
1)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는 떡입니다. 누룩을 넣어서 맛을 즐기며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여유 있게 맛을 즐기면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려고 먹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룩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제안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고 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은 누룩입니다. 너무 배부르면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날의 복음도 자꾸만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누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노예 시절을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당했던 고통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7일간 먹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이 쓴 나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노예생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허리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을 출발할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는 아침까지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급히 애굽을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12:22). 죄의 고통에서는 조금도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회개하는 것은 급히 해야할 일입니다.
다섯째 고백을 드립니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행하는 가정예식을 ‘세다’라고 부릅니다 ‘세다’에서는 네 가지 질문이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질문은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출13:8)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이스라엘 대대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한번 써 볼까요? ‘(義)’는 어린양(羊) 밑에 내 아(我)가 있는 글자입니다. 내 머리 위에 양을 올려놓으면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자를 만든 사람은 옛날 유월절을 아는 유대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을 일컬어 구약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시14:1).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했습니다. 의인은 많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기한 물건 한 가지씩 갖고 있는 삼 형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에겐 망원경, 둘째에겐 요술 담요, 셋째에겐 만병을 다스리는 사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은 망원경을 통해 왕의 담화문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낫게 해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둘째가 즉시 요술 담요를 타고 삼 형제는 공주에게 갔고, 막내가 사과를 줌으로써 공주는 나았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했을까요? 막내였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으나 막내의 사과는 줌으로써 없어졌습니다. 왕은 이 ‘희생’을 택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속죄의 양으로 드려질 때는, 사도 요한에 의하면 유월절 첫 날이었습니다. 애굽의 탈출을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 흘림과 문설주에 바른 것이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갔다면,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