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6.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0:1-18
성경에는 양이라는 말이 약 500번 넘게 나옵니다. 양은 창세기 4장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벨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때는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쳐 팔아먹고자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기에 떳떳하게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목자들이 오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목자는 들어가 각각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얼룩아, 순둥아, 말썽아” 그러면 양들은 신기하게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이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도매금으로 부르거나 번호를 붙여 부르지 않습니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살피며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고, 양도 목자가 자기에게 붙여준 이름을 알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우리에서 내어놓은 후에 양들 앞서 갑니다. 보통 돼지 같은 짐승들은 뒤에서 회초리로 때리며 몰아야 꿀꿀거리며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앞서가야 따라갑니다. 양은 앞을 잘 보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기에 뒤에서 몰면 오히려 두려워서 절대로 앞서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앞서가며 본을 보이면 목자를 깊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따라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제의 풍경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양의 특성을 이해하면 왜 예수님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개와 고양이 등은 쉽게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의 시력은 3m앞도 잘 보지 못한답니다. 충성스런 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울산에서 살던 분이 가끔 개에게 돈을 입에다 물려주고 푸주간에 가서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영리하여 자신이 먹고싶은 고기를 먹지도 않고 심부름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서울로 이사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깜박 잊고 개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돈을 물고 울산까지 내려가려고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탈진하여 그만 고속도로에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비나 연어 같은 동물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여행하고도 자기의 본향을 찾아가는 놀라운 방향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양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의 방향 감각에 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2.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겨서 구분이 잘 안되고 잘못 접근하면 찔리기만 합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아니면 스컹크처럼 가스를 내뿜는 다는가,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 아니면 덩치가 있던가 합니다. 그러나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달리기도 상대에게 치명적을 가할 수 있는 독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할 때의 방법이 총칼을 앞세우고 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주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3.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4.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십니다(요일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라고 하셨습니다.
5.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교훈 이단의 유혹과 타종교의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양의 주인은 자신의 양들이 알아듣는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사람과 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소리를 구분합니다. 목자가 아니면 양들은 순간 흩어져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한 상황을 피합니다.
한국사람이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데 “귀의 문화”가 있어서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의성어, 의태어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모두 시각적 언어가 발전했는데 우리만은 청각적 언어가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다(청색)’고 하고 나무도 ‘푸르다(녹색)’고 하여 시각적으로 색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청각에 대해서는 잠잘 때 나는 소리가 젖먹이는 ‘색색’,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콜콜’, 아버지와 어머니는 ‘쿨쿨’입니다. 현미경을 발견한 서양인들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숨소리를 ‘제트(z)’ 자로 나타낼 뿐입니다. 종소리도 그들은 기껏해야 ‘딩동’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땡그렁’, ‘댕그렁’ 뿐만이 아니라 아주 개인에 따라서 소리는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통합니다. ‘맴맴’울어서 ‘매미’가 되었고 ‘개굴개굴’울어서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뻐꾸기’, ‘뜸북이’, ‘부엉이’, ‘꾀꼬리’가 모두 그렇습니다. 숫제 ‘징’이란 말은 음 자체가 그대로 사물명이 된 것입니다. ‘細雨(세우)’란 말도 우리는 ‘보슬비’와 ‘부슬비’로 구분하고 제트기는 ‘쌕쌕이’ 배는 기선이나 화륜선으로 기능별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대로 ‘통통배’나 ‘똑딱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귀(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양만큼이나 귀가 밝은 민족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의 음성이 아니면 양처럼 피해야 합니다. 저는 이 땅에 아무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 생활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그리스도,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속히 떠나야 합니다. 지체할 겨를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부족한 종이 원하기는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도의 세 힌두교 학자들이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아 어느 날, 강을 건너려고 나루터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나룻배를 타자 늙은 뱃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학자1 : 천문학에 대하여 좀 알고 있습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힌두교의 철학은 아십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허! 당신은 반평생을 잃었군요.
학자3 : 당신은 힌두 경전이나 생물학, 심리학도 모르겠군요.
사 공 : 글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노만 저었다니까요.
세 학자들 : 딱하군 딱해 쯧! 쯧!
바로 이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룻배가 뒤집혔습니다.
세 학자들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사 공 : 당신들은 수영도 못 배웠소. 참 딱하기도 하군요. 당신들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소.
양은 아무능력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 같지만 삯군목자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고용된 목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닙니다.
삯군목자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양이 300마리 이상일 경우 대규모 목축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로 양을 칠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렇게 고용된 삯군 목자는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경계해야 되는 것은 이리떼나 맹수들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킵니다.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와 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17:34-37). 이런 위협이 있을 때 삯군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목자의 책임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부터의 공격은 막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2마리 이상의 이리떼나 다른 맹수들로부터 지킬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삯군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12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단순히 직업으로 택한 목사와 사명으로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교회선택이 한 목회자의 고매한 인격, 뛰어난 지식, 교회의 아름다운 건물, 집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그리고 18절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본문을 통해서만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세 번 언급하시고 18절에 다시 생명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선한 목자로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는 십자가 대신에 양이 한 마리가 올려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를 건축할 때 지붕에 한 인부가 떨어져 죽을 뻔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양떼 위에 떨어져 다행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죽으신 속죄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죽은 양하고는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서 양 자신보다 목자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① 양의 필요 ② 양의 건강 상태 ③ 양의 요구 등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기자는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으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선 여러분들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고 하셨습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기도하며 양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