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왕하-요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고 있으며 다른 민족들은 그 은총 밖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자기들은 자식의 도리를 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요나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 받은 요나
요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로보암2세 통치기간에 활동한 선지자인데 오늘은 요나를 구약의 선지자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현대의 우리 식으로 쉽게 선교사로 보겠습니다. 이방민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최초로 부름 받은 사람이 요나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사도행전 이후의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아니라 B.C. 793년 구약의 요나가 이방을 위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거듭되는 하나님의 부름에 별로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이스라엘민족에게 어느 정도 강하냐하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납득을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가서 유숙하는 문제로 욥바에 있을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보자기를 내려보내 각종 짐승을 보이시고 잡아 먹으로고 한 일이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행 11:1)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행 10:9-23)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행 11:5)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생각에도 이방인에게 말씀이 전달되고 성령을 받는다는 문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질투하는 죄인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나도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엘리사의 죽음과 아모스의 사역 사이에 근 40년 동안 북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유일한 선지자입니다. 그런 요나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북이스라엘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 저 큰 성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에서 동쪽으로 0.8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현재 이라크 북쪽에 있는 모술(Mosul)입니다.
니느웨는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성입니다(창 10:10). 이 사람은 바벨탑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니느웨는 ‘여신’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인구 60만의 대 도시(욘 3:3, 4:11).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바로 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그러니까 이방민족도 이방민족이지만 적국입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기 싫은 곳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욘 1:3), 니느웨는 동북쪽이고 다시스는 서쪽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 반대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에 해당하는 “타르쉬사 밀리프네이 여호와”가 두 번씩 나옵니다. 아주 의도적이고 확실히 도망가려고 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예후 왕 때 B.C. 841년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던 일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가 회개라도 해서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멸망을 기대했습니다(욘 4:2).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도망가는 요나를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일을 시킵니다. 모세도 그렇게 못한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못 벗어납니다. 그래도 그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욘 1:4) 본문에 ‘헤틸’(세게 던지다) 물 폭풍을 같다 부으셔서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욘 1:5) 사공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요나는 참 편안합니다.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 1:6)고 합니다. 너만 태평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 다니시는 분이 교회 안가면 옆 집 사람이 교회안가 그럽니다.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했는지 알아보려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도 이 배의 사람들은 현명했습니다. 재앙이 다 사람 때문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결국 요나에게 임하니까 요나가 이실직고를 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욘 1:9) 요나가 사실을 말하니까 선장이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욘 1:10) 그리고 요나는 이제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는 사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려고 떠난 비겁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선 것입니다. 폭풍이 멈추려면 나를 집어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욘 1:14) 지금 이 배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각각 자기 신을 찾았지 만은 지금은 모두 “여호와께 부르짖어, 여호와여 구하오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여호와뿐이십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이 그냥 죽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출 23:20)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시 7:13)
하나님은 선악간에 모든 축복과 심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요나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왜 하나님을 요나를 선택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지만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이래야 됩니다. 만일 “아담이, 가인이, 에서가, 가룟유다가 다시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대접과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 같이,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9) 하고 물고기가 육지에 토했는데 그곳이 니느웨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당신이 원하는 곳에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3:2),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욘 3:3) 성의 둘레는 약 100km이니까 고대 도시로는 대단히 큰 성읍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 3:1) ‘쉐니트’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은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처음임무와 같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3:2) 욘 1:2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한, 예수 그리스도가 명한 말씀을 전해야지 내 생각, 우리의 입장을 전하는 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이 성에서 요나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 장면은 사실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죽을 길을 와서 이렇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4) 라고 전했습니다. 요나는 이 성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할 수 없이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 느니웨성 사람들에게 B.C.765년에 발생한 역병과 B.C.763년에 다시 발생한 역병 때문에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고 해도, 또한 어떤 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기일식 등이 나타났다는 주장이 있어도 분명한 것은 요나가 하루동안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위협 요소 때문에 니느웨 성이 설령 회개했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에 비하면 엄청 난 사건들을 엘리야, 엘리사 때에 이미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을 계속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언제나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분열왕국부터 지금 여로보암 2세까지 133년 동안 꾸준히 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민족에게 하루동안 전했는데 니느웨 성 사람들은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온 3:5-10)

니느웨 성 사람들과 왕과 하나가 되어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1-3) 한마디로 이런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적국이 멸망당하지 않고 회개하여 망하지 않는 것을 보느니 차리라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4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하고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멀리서 정말 니느웨 성이 멸망하는지 안 하는지 보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구경을 하겠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요나가 움막을 그의 머리를 위하여 지을 때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사 덮어 주니까 요나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벌레에게 박 넝쿨을 다 먹게하시니까 요나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 4:8)고 합니다.

요나의 이런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이 발생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하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니까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적을 또 보여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눅 11:32) 라고 하셨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은 하루 복음을 전한 것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표적을 두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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