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창세기 5:족장시대 인물 연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 6:5-10)


인류 역사상 제일 큰 터널을 통과해 나온 사람과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노아의 가족일 것입니다. 우리는 올 여름 폭우로 산사태 등 서울 경기 지방에서 몇 십 명의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서울 경기 지역에 사흘간 6백 밀리미터가 넘는 물 폭탄이 쏟아지면서 큰 피해가 났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를 상상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의 가족뿐입니다. 다 죽었습니다. 홍수 이전 세대와 홍수 이후 세대를 산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현재 지구상의 200여 부족이 270여 종의 홍수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역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바벨로니아 지방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이집트, 중국, 인도, 페루, 브라질, 하와이, 피지, 수마트라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망라합니다.

후레이져(James Frazer, 1918)는 <구약성서 속의 민간전승>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에서 전 세계 지역에서 138 개의 홍수전설을 수집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네 가지의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홍수를 야기한 도덕적 문란이며, 둘째는 신이 사람에게 홍수를 미리 예보했다는 사실이고, 셋째는 구원받은 몇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의 멸절과 마지막으로 동물들이 홍수의 시작과 종료를 알려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큰배가 동원되었다는 내용도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설화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를 부정하고는 오늘날의 지구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설화 비슷한 것이 남아 있지만 노아의 홍수를 제일 정확하기 기록하였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노아만이 홍수 이전세대와 홍수 이후에 산 사람이니까요. 노아가 950세를 살았는데 500세에 셈, 함, 야벳을 낳고 600세에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창 9:28).

진화론자들도 지구의 대 홍수는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피해서 증거 하려고 노력합니다.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자칫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하다가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염려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피해 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우스운 것입니다.

진화가설자들의 이론 세대구분 : ‘효신세, 시신세, 점신세, 중신세, 선신세, 홍적새(노아 홍수 이전시대), 현새’로 봅니다. 진화론자들 시대를 오래보는 것은 진화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홍수 이전 세대를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아서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홍적새라는 그 이전은 전부 엉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노아는 의인(짜디크)이요

당대에 완전(타밈)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노아에 대한 평가입니다. 의인(짜디크)가 창 7:1에 다시 한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고 하셨습니다.

의인(짜디크)는 공평한, 공정한 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완전(타밈)은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레 1:3)고 나오는데 여기에 타밈이 나옵니다. ‘흠 없는’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을 말씀하실 때 사용된 것입니다.

이 단어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사용되었습니다. 완전한 상태가 무엇이냐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욥 12:4)라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공평하다는 말이고 ‘완전’은 흠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도 다 지키기 어려운 것인데 노아는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나옵니다. 노아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사람이 나옵니다.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소개합니다.

족장시대에 중요한 두 사람이 소개됩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그 이전에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힌트를 에녹의 경우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 5:22)입니다. 오늘 본문도 “…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무엇이 강조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낳은 것으로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부에 유력하게 올랐지만 아들이 군대에 갔다오지 않은 것 때문에 두 번씩이나 대통령도전에 실패한 분이 계십니다.

의인이 되기 위한, 완전해 지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아가 혼자 공의롭고 흠이 없다고 하나 그것은 아내와 자녀들이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혼자란 없습니다.

제가 요즘 하도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고 그래서 컴퓨터 커미니티 활동들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facebook에서 메일이 들어오는데 이제 막는 것도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래 한번 해보자 그리고 다시 들어가 정리하고 나와 친구 하겠다는 사람 다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모임 중에 80년 PC통신 세대 목사님들만 모여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 제가 들어갔습니다. 한 30여명 모여 계신데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입니다. 제가 들어갔더니 너무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댓글이 쭉 달렸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저에게 ‘전설이 오셨다’고 하면서 환영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정말 좋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우리 집사람이 배추 공짜로 준 시골에 머물고 계시는 선교사님이 저희 집사람에게 ‘컴퓨터선교회’ 아니냐고 하면서 15년 전에 영등포에 사무실에 있을 때 다녀가셨다고 하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갈 때 제가 모델이었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묵묵히 보고 계시면서 존경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단순히 제 자랑이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격려하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순종해 주지 않으면 다 소용없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그 큰 방주를 혼자 만들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삭’이 말을 안 듣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버지 이상해, 더위 먹으셨나봐” 그러면서 도망가면 무슨 재주로 잡아다가 제단에 위에 얹어놓겠습니까?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두 아내가, 자녀가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노아 자손들이 그렇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복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아온 십계명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십계명이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모세가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개의 십계명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출애굽한 광야 백성에서 선포된 것이고 두 번째의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신세대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두 번 기록된 것이 아니고 듣는 대상이 다릅니다. 첫 번째 백성은 불순종하여 결국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함께 가지 못하니까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고 하셨습니다. ‘볼지어다’(ijdouv:이두)는 미완료 중간태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와 함께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제자 삼는 것은 땅 끝만 강조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세대까지 복음을 전달해야 함이 더 강조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오는 여러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자신이 현재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릴레이 마라톤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중간에 뛰는 사람이 전달을 잘 못하면 그 다음세대에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다음세대가 한결 수월해 집니다. 우리 전 세대가 참 어려운 시기에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받돈을 넘겨주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세대에 최선을 다해서 이 복음의 받돈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실패담은 구약성경 내내 이어집니다. 그 결정적인 요소가 무엇이냐, 바로 다음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중심 말씀은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과 자녀들에게 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7족속을 완전히 몰라내지 못해서 결국은 발목이 잡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처음부터 염려하셨습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4)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무서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상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신앙생활인데요, 이런 말을 합니다. 조상이 가르쳐 준 것이고 내려오는 전통이니까 마음으로만 따르지 말고 적당히 절하고 그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마음으로는 따르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이런 사상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입니다. 이게 서양철학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쇠퇴했습니다. 여러분 정신은 안 따라 갔는데 몸을 주면 어떻게 됩니까? 용납이 됩니까? 바론 이런 사고가 공산주의 유물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정신만 있으면 되지 무슨 몸이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합니까? 사탄이 그 정도로 물러갑니까? 조그만 틈만 보여도 그 약점을 놓지 않는 사탄이 가만 놔두겠습니까? 그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마지막 말을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4-50년 동안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옷니엘, 에훗, 드보라(여선지자), 기드온, 입다, 삼손을 보내십니다. 이 사람들은 열왕기의 마지막 선지자들과 다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 후 세대에 보내진 선지자들입니다. 순종은 나를 살릴 뿐 아니라 우리 후손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반드시 나의 자녀들, 그들의 세대에 복음을 잇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복음을 잇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 끝은 많이 생각했지만 다음 세대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초보 신앙을 못 벗어나는 것은 그냥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축복중의 축복은 자녀의 축복, 다음세대에 복음전달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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