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서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러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이것이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되는 시대적인 배경입니다.

한절 더 보실까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 11:1) 출애굽 때 하나님이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이게 뭐냐는 겁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냐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호 6:4)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박한 심정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모스가 정의를 강조했다면 호세아는 사랑으로 호소한 선지자입니다. 호세아는 부끄러운 자기 가정생활을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마다 특징이 있고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목회자마다 교회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금을 고르게 함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제일 좋지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만 강조하면 사랑만 받으려고만 하여 신앙이 안 자랍니다. 의무와 책임이 없어지고 어린아이 같이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하는 신앙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환난이 있고 천국에 들려 올라갈 것이냐? 아니면, 환난 없이 먼저 하늘나라에 갈 것이냐를 가지고 싸웁니다. 그것을 ‘전 천년설, 후 천년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나 종말론자 등은 이 땅에서 환난이 없고 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듣기는 좋지요. 안심이 되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람을 많이 모아 놓은 것으로 성공을 평가한다면 이슬람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때부터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등극하여 기독교가 자유롭게 되기 전까지 로마의 10대 박해를 당했던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예외였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환상에 젖어있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 할 줄 모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하게되면 하나님을 무서워만 하게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사람들은 신비만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신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단물이 우리 몸에 필요하지요. 그러나 매일 설탕물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1) 이런 말씀은 호세아에게 특별히 임한 말씀입니다. 성경가지고 아무데나 넘겼더니 말씀이 나왔는데 그게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새 해가 다가오면 그런 것 잘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점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보다가 어느 날 성경을 폈는데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그래가지고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이런 말씀들은 보편적인 말씀들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선포하시기 위해 특별히 주어진 말씀입니다. 구절 뽑기, 무슨 예언학교 이런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호 1: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후를 통해서 오므리 왕조를 끝냈는데 그 때 예후가 오므리를 죽인 곳이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왜? 호세아에게 그 장자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했느냐 이해가 가십니까? 바로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 요람(여호람)을 죽인 곳이 이스르엘입니다. 하나님이 왜 호세아의 장자 이름을 그렇게 지으라고 하셨겠습니다. 예후왕조(89년:예후,여호아하스,여호아스,여로보암,스가랴)를 끝내겠다는 말입니다. 네가 오므라 왕조에게 한 것 같이 하나님이 예후 왕조에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역사를 알아야 해석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호 1:5) 이해가 가십니까? 예후가 자기가 오므리 왕조를 꺾을 때처럼 예후 왕조 또한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딸을 낳으면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호 1:6) ‘로루하마’는 ‘은총을 입지 못하다, 동정을 받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자기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로암미’를 직역하면 ‘나는 너를 위하지 않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제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녀가 헤어질 때 뭐라고 합니까? ‘이제 길거리에서 혹시 마주치더라도 우리 아는 체 하지 말자.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강력한 말씀을 통해서, 호세아 가정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듣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단호하신 입장은 단순히 예후왕조가 멸망한다는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맺어온 관계를 끊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관계를 남녀간의 혼인관계로 이해시키고자 호세아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언약 관계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6:7)
이제 이러한 특별한 언약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실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3)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입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을 따라 지키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키려는 생각도 없음을 하나님이 알고 이제 관계를 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첫 아들이 “이스르엘”이고 둘째 딸의 이름이 “로루하마”이고 셋째가 “로암미”입니다. 마치 예후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오므리왕조를 끝장낸 것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이고 ‘로루하마’다시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로암미’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집에 들어와 보니까 집안이 엉망입니다. ‘엄마 어디 갔어?’ 세 자식들이 있는데 몰라요 어제 저녁에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로암미 세 자식이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음녀 짓을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자기 아내를 찾으러 사창가로 나갑니다. 그리고 데려오려고 하는데 그냥 못 데려 간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 데려오는데 돈을 주고 찾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기가 막히니까 그냥 오려고 합니다. 이제 끝이다 하고 오려고 하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고 하셔서 또 데려옵니다. 나가면 또 돈주고 또 데려오고, 계속 데려오면서 호세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1)
“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호 5:1)

우리가 살길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면서 호소합니다. 진짜 누가 호세아 말고 하나님의 그 애타는 심정을 알겠습니까? 목자의 심정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드고아의 목동 아모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호세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선지자들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2)

“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1-2) 라고 하나님은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여러분! 교회 안에서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그러는 줄 아는데 사실은이요 하나님만 왕따 당하고 우리끼리만 자화자찬하고 그냥 뭐 하소연 하다가 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맺힌 게 많아서 그거 토하고(기도) 말 많이 하면 속이 시원하고 하면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좋은 교회라고 착각하고 돌아갑니다. 그런 식으로 평생을 교회 다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말씀을 가지고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10-11). 우리도 비슷합니다. 세상 적으로만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좌로 가면 공산주의요, 그러면 우로만 가면 되느냐 그쪽은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되느냐, 여러분! 가고 가면 자본주의는 놀음하고 비슷해서 결국 가진 사람이 다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중산층이 다 사라지는 것이고 재벌하고 셀러리맨만 남습니다. 그리고 무슨 미국이 일본이 중국이 우리를 위해 주느냐 천만예요 그 나라들이요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은 찾지 않으면서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의지하지만 결국은 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여러분!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지만 그것은 그냥 사람들이 말 그대로 ‘상징’ 한다고 생각하고 만든 말일뿐입니다. 비둘기의 진짜 특성은 뭐냐하면 귀소본능입니다. 비둘기는 먼 곳에서도 자기 둥지로 돌아오는 귀소성이 제일 발달된 새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았을 때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1분 동안에 1km나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비둘기는 자기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쳐놓은 그물을 보지 못하고 애굽으로 가고 앗수르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미치면 까마귀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개가 미치면 자기를 기르던 주인을 뭅니다. 미친 개 입니다. 미친 비둘기입니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9)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다레키 여호와’(여호와 길)인데 이 길은 정직(예솨림) 기본어 ‘야솨르’는 하나님의 길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비둘기라면 “말씀을 가지고 돌아 오라”,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께 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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