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믿음(야고보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신약의 일곱 책들(야고보서, 요한 1,2,3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을 "공동서신"으로 부릅니다. 이 용어는 구체적인 수신자가 기록되지 않고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들 편지들의 영감성에 대하여 논란을 벌였고 5세기 초에 가서야 이 서신들에 대하여 최종적인 승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가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입니다(행 7:54-8:3). 당시 팔레스틴에 300만이 살았고 로마제국에 유대인 총 400만 명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민족이 흩어지는 이유는 전쟁이나 박해 또는 살기 힘들어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매우 심한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즘처럼 세상 복이나 받아보려고 교회에 오는 분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은 ‘페이라스모이스’()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부로부터 오는 시험, 갈등이나 유혹이 아나라 ‘시련’(trial)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다음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4)고 했습니다.
유혹은 사탄이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여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험은 내 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 해야합니다.
하지만 시련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여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대답은 “기쁘게 여기라”(2절)입니다.

시련에 견딜 각오 없이 그리스도를 믿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산 시련이 닥쳐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고 했습니다. 구약의 고난의 대가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모두 10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54절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은 유대교 회당으로 보내졌지만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보일 것을 촉구하는 서신입니다.
아울러 당시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승리할 것을 격려하는 서신입니다.

야고보가 이런 시련에 참고 견딜 것을 말하면서 인간적인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행함에 있어 제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없지만, 기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혼자 선행을 하면 문제가 되고, 행위로서 구원을 얻으려는 잘못된 판단일 수 있지만 기도로 행하면 다릅니다. 기도는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야고보서를 잘 보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행함이 아니라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시련을 견딜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5-6)
여기서 눈 여겨 볼 부분은 “구하라”(아이테이토:)입니다. 아이테이토는 아이테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 구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에 나오는 ‘시험’은 페이라조메노스)는 ‘유혹’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함으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잘못된 것일수록 그 책임을 지금도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유혹 때문에 넘에가는 것입니다.

흔히 야고보를 선행의 사도라고 부르고, 요한을 사랑의 사도, 바울을 믿음의 사도, 베드로를 소망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들마다 이런 개성이 있기 때문에 특히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3:28)는 말씀과 야고보의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약 2:26)는 말씀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 둘의 차이점은 강조 점과 정의의 문제일 뿐입니다.
(* 루터가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과 배치된다고 보고 ‘지푸라기복음’이라고 혹평하였다.)

야고보서를 보면서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서와 비슷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심”(약 1:5, 잠 2:6)
“말의 조급함과 성냄에 대한 경고”(약 1:19-20, 잠 29:20-21)
“의의 열매”(약 3:18, 잠 11:30)
“허탄한 자랑에 대한 경고”(약 4:13-16, 잠 27:1)
“모든 죄와 허물을 덮는 사랑”(약 5:20, 잠 10:12) 모두 5번 나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과의 연관성입니다. 유사한 구절들이 17번이나 나옵니다.
[야고보서와 마태복음간에는 유사성이 상당히 많다(2:13을 마 5:7과, 3:12을 마 7:16과, 3;18을 마 5:9과, 그리고 5:2,3을 마 6:19-21과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만일 무시하는 것은 잠언서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고 합니다. 잠언서의 일부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부르는 짖는 자가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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