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으로…(베드로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베드로는 알려진 대로 말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서를 쓰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유일하게 기록한 성경이 베드로전, 후서입니다. 이것도 자신이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제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습니다(벧전 5:12). 그래서 혹자들은 아람어 밖에 몰랐던 베드로가 세련된 헬라어로 기록한 것을 가지고 베드로 저작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힘차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되실 때 보았던 세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 중에 야고보는 44년에 제일먼저 순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광경을 본 사람은 베드로하고 요한 밖에 없습니다. 역시 이 사람들이 제일 담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제자 아닙니까? 그리고 변화된 모습과 부활 후에 예수님을 만난 제자입니다.
베드로의 약점은 학문이 출중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학문이 출중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목격하고 쓰는 베드로서는 비록 대필되었고 짧지만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때는 로마의 네로황제가 집권하여 거의 미쳐가던 시기였습니다.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의 대 화재가 발생합니다. 너무 무력한 시간을 보내던 네로가 시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로마를 불질렀습니다. 그리고 크게 문제가 되자 이 사건의 주동자를 기독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베드로는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지역을 아신다면 고개를 까우뚱 하실 것입니다. 이 지역은 당시 소아시아의 북쪽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Taurus Mountains)이 있는 곳입니다. 당시 이곳은 로마지역입니다. 그리고 본도와 비두아니아는 동일 지역으로 봅니다. 유대인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B.C. 586년경에 바벨론 포로가 된 이후, 또는 북왕국이 B.C. 722년 아수르에 의해 멸망된 이후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옛ㄴ날부터 흩어진 유대인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로마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주로 전한 지역은 남쪽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지역에 기독교인이 대부분 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쪽으로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핍박이 얼마나 거셌으면 본문에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고 했습니다. 본문을 실제 바벨론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로마를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바벨론의 힘과 포악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받아 읽을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중이었기 때문에 위로의 말이 필요했습니다. 그 위로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잠깐의 환난을 기쁨으로 견디라는 것입니다.
역시 베드로도 옛날 베드로가 아닙니다. 불을 명한다거나 예수님이 마지막 잡히시던 밤에 말고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듣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던 베드로는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도” 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아니면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봉기를 하거나 마지막 때에 막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비록 지금의 때가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본분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5가지 이야기합니다(도표 참고).
1) 1:13-21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2) 1:22-25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3) 2:1-3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4) 2:4-10 신령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5) 2:11-12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 때 네로 황제의 핍박을 피해 도망가서 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답게 담대히 외치는 말씀을 대할 때 오늘 우리의 어려움 들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헬라말을 잘 못했지만 베드로는 담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하실 때 헬라어 잘하나 보고 뽑았습니까? 순종하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복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국가에 대하여, 고용주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범사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베드로서는 희망이 넘칩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노예가 매달려 죽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을 때에 가졌던 의지할 데 없던 감정이 예수가 부활하셨을 때에 그의 소망은 살아났습니다(벧전 1: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할 때 마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좌절이 희망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벧전 1:8) 네가 나를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 5-)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는(벧전 5:2) 권면(요 21:15-17)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오늘날에도 흔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만 다섯 번이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 있는데(벧전 2:2, 벧전 3:18, 벧전 4:1, 13, 벧전 5:1) 마치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광경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는 말씀은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새 소망의 기쁨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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