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전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니까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최고의 신의 개념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신 데 육신으로 오신 분이라고 우리는 설명합니다.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뭔 소리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많이 들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않을 뿐입니다.
가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꼭 이런 방법으로 오셔야 했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하나님은 아시는가? 이렇게 오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얀빛의 형태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천둥소리 들어보셨나요? 얼마나 우렁찹니까? 그런 소리로 음성이 들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벌벌 떨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분의 음성 소리 한마디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조이며 살려달라고 말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천군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며 바람이 전주곡을 넣고 천사들이 노래한다면 온 세상이 주목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신 데 무슨 방법인들 사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제 생각과는 정 반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은 너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마태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제가 성경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러한 사실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도 너무 찾다 보니까 목동들이 알았다고는 적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 너무 초라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땅에 방문만 해도 이런 식으로 영접하고 예우하지는 않습니다. 영접은커녕 자신들의 왕위에 권력에 눈이 멀어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하는 요셉은 어떻습니까? 아니 아이가 태어날 때가 다 되었는데 여관방 얻을 돈이나 권력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간신히 마굿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이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우리들처럼 10달을 채우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출산 준비를 하고 아무리 호적하러 가는 길이라고 해도 예수님 출생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요셉은 너무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냥 목수입니다. 창조주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꼭 이런 방법을 선택해야 하셨을까요? 돈이 있거나 학벌이 있거나 권세라도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오신 하나님이 믿어집니까? 저는 어떤 면에서 믿는 우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슈퍼스타가 되시려고 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먼지가 이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마리아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면서, 이웃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게으른 농부가 흉작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견뎌 내셨습니다. 무슨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그분은 ‘사랑’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랑했던 “예수의 품에 누었던 자”라고 소개한 요한은 나중에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한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기록했을까요? 예수 안에서 하늘이 뻔쩍이는 것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예! 가끔은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번쩍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빛이 아닙니다. 그런 영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해 보셨나요?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몸배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시락을 챙겨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문을 두드리며 밖에 서 계신 어머님의 모습을? 학생들은 교실 창문 넘어로 호기심에 다들 쳐다봅니다. 창피해서 어디로 숨고 싶을 지경입니다. 정말 밥 안 먹어도 산다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따지고 듭니다. “엄마 학교에 왜와. 다시는 오지마!” 그러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너 배 고플까봐”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십니까? 나중에 이 아이는 커서 어머니의 심정을 알고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자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사랑은 서낭당 벽에 그려진 산신령보다 좌불상을 하고 앉아있는 그 형상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었습니다(마 9:24).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요 10: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마 27:39) 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할 유대인 중 바리새파 약 70%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청지기 비유를 듣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받으신 멸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박수를 쳐주어도 그 모욕과 고통은 참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길을 가셨을까요?
리 아이엘피는 그 대답을 알지도 모릅니다. 그는 뉴욕시의 은퇴한 소방관입니다. 뉴욕시를 위해 26년 간 소방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들 조나단 아이엘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뉴욕시 소방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에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질 때 그의 아들 조나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석달를 찾아 헤맸습니다. 12월 11일 화요일에 조나단의 시신이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리 아이엘피는 아들의 시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 시신을 왜 찾겠습니까? 세계무역센타가 무너질 때 조나단 아이엘피는 죽었습니다. 나도 죽었습니다. 죄로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사랑은 모든 견딥니다. 번개의 빛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렛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합니다.
사랑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세계로부터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먼 길이 막지 못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창조물의 모든 짐을 지고 방주에 올랐습니다. 우리가 그 무게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멸종되는 보호 동물, 식물을 발표하였습니다. 환경부는 열목어 등 59종을 새롭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습니다. 새롭게 지정된 안에 따르면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는 열목어, 따오기, 수원청개구리, 노란산잠자리, 염주알 다슬기, 각시수련, 화경버섯 등 59종의 동식물을 신규 멸종위기종 지정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수원 청개구리 보시면 잘 돌봐 주세요.

이제 그것이 죽으면 이 땅에 그런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소를 죽였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는 소고기를 못 먹었을 것입니다. 방주의 문을 닫고 들어가 40일을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방주는 턱 하고 어딘가 걸려 머물러 섰습니다. 그리고 꼭대기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을 맑게 개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물입니다. 물에 고립되었습니다.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까마귀를 내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을 닫고 그만 포기하려고 하는데 저 쪽에 비둘기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창 8:11) 라고 했습니다. 홍수로 섬에 고립된 사람들에게 헬리콥터 소리만 들려도 소망이 생깁니다. 암 환자에게 ‘종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라는 말에서 소망이 들립니다. 파릇 파릇 올라오는 연한 올리브나무 잎을 물고 온 비둘기는 노아에게 소망의 징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우리에게 사방에 물로 갇혀있는 노아의 심정보다 더한 것입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인간에게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있었던 몇 사람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등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죄가 깔려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도덕을 강조하고 선을 말해도 선해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비둘기가 저녁때 물고 온 올리브나무의 새 잎입니다. 소망입니다. 이제는 살 수 있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치료의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그 해결책을 찾은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입니다. 말씀도 한 절 한 절 깊이 생각하면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깊은 은혜를 맞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설렁탕, 곰탕 같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농부들이 밭을 간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시킬 때 이렇게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소에다 나무로 만든 마구를 달아 멍에를 함께 지도록 한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늙은 소에게는 마구를 단 끈을 단단히 맵니다. 그 소에게 짐이 더 실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소에게는 끈을 느슨하게 묶습니다. 함께 걸어가지만 지고 가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통나무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제일 힘듭니다. 그런데 가운데 키 작은 사람이 끼어 있으면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 그분이 무거운 짐은 다 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그분 옆에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의 시로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다시 번역하여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이 그 어디 있어 이 일 찬찬히 바라보며 한결 같이 따스하게 아껴 주시는 여호와 주님의 사랑 깨달을 수 있으랴”
최고의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거기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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