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제가 한번은 강원도 길을 운전하고 갔습니다. 그 때는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터널이 뚫린 것 같은 길이 나왔습니다. 그냥 직진하면서 나온 길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 터널로 들어갔습니다. 터널은 아직 불도 안달아 놓았습니다. 터널을 다 빠져 나왔는데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없으니 더 이상 갈 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좁은 길에서 유턴 하여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 뒤로 관광버스가 따라오고 다른 차들이 따라왔습니다. 그 관광차는 길어서 그 좁은 길에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택시기사가 후미진 곳으로 가는데 차들이 계속 따라오더랍니다. 자기는 소변 좀 보려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자꾸만 차들이 따라오더랍니다.
길을 잘못가면 나만 잘못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행군할 때 뒤에 오는 사람 잘 보이라고 철모 뒤에 흰색으로 표시합니다. 밤에 행군할 때 앞사람만 보고 가는데 한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면 뒤에 오던 사람이 다 다른 대로 갑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그랬습니다. 예수님만 잘 따라가면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빵이 없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지 못한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본문보다 더 간단 명료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말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이것은 윤리입니다. 예수님은 윤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가는 방법에 대해 긴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요” 이것은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철학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가 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보여주시며 ‘바로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스펜서는 물리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정의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인류의 길이라고 외친 사람도 많았고 자기가 진리라고 말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지가 ‘생명’이라고 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운명을 극복하신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다.(골 2:2)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는 인간 이성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기묘자이며 모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 11:25-26).

사람들의 생각이란, 주장이란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와 논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보내시고 400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우리하고(사람들) 논쟁이나 하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말씀이 구체화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솔직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든, 안 하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생명을 얻는 길을 이 길 외에 없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0-11)

이 기막힌 일을, 이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강압적이거나 이 세상의 최고의 인재를 뽑아서 전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출신 몇 명과 그나마 똑똑한 제자처럼 보이는 마태는 로마 공무원이었지만 그는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렇게 많은 수의 제자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딱 12명입니다. 물론 따로 70명의 제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12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앉혀놓고 천자문을 외우라든지 명심보감을 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영혼불멸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어떻게 이기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교훈적인 설교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들을 축복하고, 한 어린이를 한 가운데 놓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기도하고 떡을 떼시고, 기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 평등권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던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여인들을 만나셨습니다.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도 여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상가들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세상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복음 적인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지난 2000년 간 우리가 실수한 것은 바로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이 동양의 인도에게 초대교회 이후 다시 전달되었을 때 인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국주의와 인도에 대한 외국의 지배와 동일시했습니다. 인도뿐만이 아닙니다. 전 아프리카와 남미의 대륙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선교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양 문명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가 위험에 빠져있습니다. 북한은 계속 침략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현지 인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겸손하게 만드셔서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나라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또 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스탈린은 신학생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으로 변했습니다. 히틀러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세례 받았습니다. 이런 표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무당만 사람잡는 것 아닙니다. 잘못된 기독교인은 선무당보다 더 무섭습니다.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분명히 다른 모습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태의 껍데기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하십니다.
라오디아게아 교회에게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온전히 예수님의 방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검정 색을 다 버리지 않고 흰색을 섞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검정 색을 조금만 남겨 놓아도 희게 되지 않습니다. 회색이 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어두움은 빛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 11:14-15)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 11:18)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악한 것은 그것이 능력이 있든, 크고 작든 악한 것을 못 물리칩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입니다.

스탠리 존스(1884년-1938.12.12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는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선교사로 지냈습니다. 1920년대 초반 타고르, 간디와 함께 아슈람(Ashram)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서양 선교사 중에 간디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깊은 대화가 오고가는 중에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당신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간디가 한번은 어느 마을에 기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차를 타고 함께 도착했습니다. 간디의 연설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간디는 연단에 올라 ‘신약성경’을 꺼내 들고 ‘산상수훈’에 대해 읽고 이렇게 그의 연설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연설입니다. 이렇게만 행동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본문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죄를 당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3:18).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클로로포름의 발견과 마취제의 최고 권위자인 영국인 의사 심프슨에게 “당신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구세주를 발견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보시는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무엇을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까? 다만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날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의 방법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했습니다. 행위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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