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도시)과 아브라함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2-33)

지난주 미션매거진(285호)의 메인 타이틀을 ‘다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유럽 재복음화의 필요성과 전략)’ KOSTE 발표 – 최종상 선교사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유럽의 개신교 출석교인은 평균 3퍼센트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1퍼센트도 안 되는 나라가 22개국이나 됩니다. 프랑스만 보더라도 60년 전에는 전체 인구의 96%가 천주교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6%만이 미사에 참석하며 개신교는 2%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0.6%에 불과합니다.
1998년 12월 14일 짐바브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당시 조지 캐리 캔터버리 대주교는 “우리(영국)교회가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The Church is bleeding to death)”며 기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더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유럽은 이미 복음화 되었다 쇠퇴하는 대륙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잘 정리된 원고를 올렸습니다. 미국과 한국교회가 ‘전방개척선교’만 부르짖다가 뒷문을 열어놓고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을 재복음화 시켜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받아본 한 회원이 저에게 메일로 답신을 하기를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유럽 교회가 쇠퇴해 가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내용인데 글이 너무 길어서 계속 보다가 짜증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원고가 길고 복잡하다고 왜 화가 나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나는 교인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할 때는 핑계삼아 아주 교회에서 24시간 살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하루종일 양 잡아서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몇 일씩 했습니다. 솔로몬이 대단한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것은 1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셨습니다. 1천 마리의 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일을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이 시대의 사람들의 심리가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도시화 될 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지고 무언가 늘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급하고 빨리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까 기다리지를 못하고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이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유럽 교회의 문제도 도시화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문제도 도시화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을 쫓아 살았습니다. 향락의 도시입니다. 광란의 도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 사회를 주도하는 장소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지금도 도시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도시화의 현상은 사람들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였던 시대처럼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술 소비 세계 1위의 나라 – 우리는 물 마시듯이 술을 마셔대는 국민입니다. 대학가 앞에 술집과 옷 집으로 뒤덮여 있는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합니다.
2006년 기준 알코올로 인해 정신장애를 앓아 본 성인 남녀의 비율(정신장애 유병율)은 5.6%에 이르고, 1년에 4조 4,702억 원이 술을 마셔 없애버립니다. 2008년 성인 1인당 소주 소비량만 74.40병(360ml 기준)입니다. 여기에 막걸리 빼고도 맥주, 포도주까지 합하면 엄청납니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20조 990억 원(2004년 기준)에 이르고 국내 총생산(GDP) 대비 2.9%의 수준입니다. 나아가 음주는 자동차사고, 가정폭력, 살인, 행동장애, 자해·자살 등의 원인이 됩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나라 – 지난해 15,413명으로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하루 평균 42명, 53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것입니다.
흡연율 1위의 나라 – 길거리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다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흡연율은 남자(20.7%), 여자(5.2%)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도 시작합니다. 성인 흡연율에서도 미국(28.7%), 일본(60.1%), 중국(61.8%), 러시아(65.7%), 대한민국 (69.6%)입니다. – 2010년 세계보건 기구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공허해져서 흥청망청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법을 세우는 국회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빨리 썩어 가는 나라가 또 있습니까? 오늘 이 나라가 눈물의 중보 기도자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얼마나 피할 수 있겠습니까?

미신과 우상의 상징인 ‘갓바위’가 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팔공산의 절들 안에는 산신을 숭배하는 산신각이 함께 있어 대구 지역의 불교가 기존의 산악숭배를 흡수한 혼합적인 우상숭배을 하고 있습니다. 팔공산 지역에 막대한 국비를 동원하여 불교테마공원을 건립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 동족에게 총을 쏘고 있습니다.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사력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의 핵 폭탄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타락한 도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악의 도성을 심판하기 위해 가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져 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간구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간이 아니라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배가 드려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배불렀습니다. 우리는 정말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맞추고 순종하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하나님은 떠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회는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만들고, 내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까?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
여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이제 ‘그 사람들’(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상을 직접 알아보기 위하여 소돔으로 향하여 갑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오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사해 연안 싯딤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도시 중 대표적인 도시들입니다. 이곳은 요단강 저지대에 의하여 물이 풍족했고, 부요와 환락으로 뒤덮여 있어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을 제치고서라도 차지하고픈 그런 도시였습니다. 롯의 육신 적인 눈에는 이 도시가 마치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습니다(창 13:10).
그러나 이 도시는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고 했습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이 땅의 억울한 사람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하나님의 귀와 눈에 그들의 죄악상이 생생히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죄악의 도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워지고 허무시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도성입니다.

그러나 소돔 심판을 막아선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본문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에스겔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막아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심판을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누군가 있어야 했습니다. 대서양에서 쾌속 항해를 하고 있던 타이타닉호 위의 2,200명 사람들 중에서 술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부귀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죽음의 항해를 하고 있던 그 배에는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는 없었습니다.

소돔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선 사람 아브라함은 죄악 도성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은 위대한 ‘중보 기도자’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습니다. 유흥적인 도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찌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브라함은 무너져 가는 도성을 온 몸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본문 27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이나 재에 불과 합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고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못 채우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들 떨어진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천재가 아닙니다. 휼룡한 도덕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을 건 기도가 시작됩니다.
23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은 의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의 의인으로 시작하여 10명으로 마쳤습니다. 소돔 인근 네 성읍들(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지역을 합하면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1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전 권에 들려면 해보는 만큼 해야 합니다. 그래서 10명까지 줄여 놓았습니다.
“거기서 45명을, 40명을, 30명을, 20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28-31절)
줄여 가다가 마지막에 32절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이미 멸망으로 끝날 심판의 상황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바꿉니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도시이지만 그 도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우리도 이 땅은 안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뿐만 아니라 그 성중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이 땅을 심판하실 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받는 것,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결국 어떠한 기도이든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합니다. 세상을 살려내는 힘이 기도에서 나옵니다. 사탄이 다른 것은 다 막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막지 못합니다.
성도의 향이 기도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마지막 때에 천사들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도 기도입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기도하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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