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앙망하고 주의 팔에 의지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4-6) 

사람의 첫 번째 죄, 두 번째 죄, 세 번째 죄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시고 하와를 주셨습니다. 하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아담(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물론 아담도 하와를 도와야 합니다. 서로 돕고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지어진 목적이 그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도와 줘야 하는데 사탄의 꾀임에 빠져 그만 아담이 아니라 사탄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와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었고 이 부부는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남자 분들 잘 들으세요. 사탄이 제일 간교하고요, 그 사탄은 여자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여자 말 너무 잘 들으면 안됩니다. 그냥 설거지하는 것 정도는 들어주세요. 남자가 가정을 리더하지 못하면 문제입니다. 가정을 지키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목소리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아담을 부르시며 …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여기 잘 보세요. 죄를 지은 사람을 부르시는데 하나님은 하와를 먼저 찾지 않습니다. 아담을 찾으십니다. 책임이 아담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주가 아담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었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자기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 질투하여 결국 살인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 번째 음성이 가인에게 내려집니다. “6…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7 내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사람이 많아졌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보기에 좋은 여자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고 물로 이 땅에 홍수를 내리십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뽑습니다. 노아였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말한 사람은 ‘욥’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시고 이스라엘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소개한 사람은 ‘므두셀라’(창 5:22), ‘에녹’(창 5:24) 두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만큼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이 세상을 제 창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였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살려두실 자와 없애버리실 자를 선택하고 계십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예수님은 첫 설교에서 우리에게 8가지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5:1-12).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복을 주지 않은 일이 있나 찾아보세요. 책망하고 버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고쳐 쓰시기 위함입니다. 회개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둡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4절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먼 길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힘드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멀어도, 힘들어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다 좋은데 한가지 너무 물질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성공시키려면 반드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것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무너진 지 오래되었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4절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고 하셨습니다. “세우리라”는 원문은 ['yGIr]a(아르기아)인데 어근인 [g’r;(라가)에는 여려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다, 절단하다, 던지다, 열다, 해결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내가 해결할 것이다” 또는 “내가 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 고 했으며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히 10:20) 라고 했습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캄보디아 조성규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것인데 캄보디아 어느 지방의 촌인데 한 지역을 개발시키고 우물을 파주고하는 외국 분들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거의 현지인 처럼 생활하면서 돈이 모이면 우물하나 파주고 하면서 몇 년째 일을 하는 분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조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일을 하는 분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나와서 거기서 몇 년째 그러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놀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요. 하버드를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는 1638년 여름에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단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버드라는 이름은 마치 삭개오처럼 자기의 책과 재산의 절반을 대학에 기증한 청교도교회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입니다. 19세기 초 신학대학·법과대학·의과대학으로 개설된 학교입니다. 하버드 대학교는 청교도 목사에 의해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전통이 있습니다. 학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배우기보다는 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배우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다른 것 다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끝납니다. 본문에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법학’입니다. ‘법’이 무너지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미국 서부에서 얼마나 총질을 해댔습니까 심심하면 사람이 죽는 겁니다. 도적질에 살인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법은 십계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슨 돈 벌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법이 아닙니다. 본문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법이 나가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이라야 합니다.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파라오가 만든 법이 아니고 공산당이 만든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학’입니다. 고통과 아픔에서 구하는 의학입니다. 이 세 가지 학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할 때 이 세 가지를 권해보세요.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가르치세요. 신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법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의학을 하라고 하세요.

오바마 대통령도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오바마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 민간기업에서 잠시 근무 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 된 시카고에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 등 지역의 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주목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법을 모르니 도와줄 한계를 느끼고 하버드 법대를 들어가서 공부했습니다. 하버드학교에서는 꼭 면접을 봅니다. 학생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 때 제일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하고 인류와 미국을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할 사람인가를 판단합니다.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들을 법을 알아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하버드는 이런 사람 제일 좋아합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인 2세 아이가 미국 SAT(미국 대입학력고사)시험을 수석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지원한 학교가 하버드였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버드 총장에게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우리 아이가 떨어진 것을 납득이 가게 설명해 달라고 당당하게 보냈습니다. 부모님들의 생각은 SAT에 수석을 차지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학교를 나와서 인류와 미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 학생이 지금까지 봉사한 경력이나 또 그런 봉사를 하겠다는 사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점수는 부족해도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겠다는 신념이 분명하면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학교를 2학년 다니다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세운 빌게이츠도 얼마나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삽니까. 정신이 있는 겁니다. 함께 사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쏙 빼놓고 자본주의만 배우면 안됩니다. 협력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일은 힘들다고 포기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나갔습니다. 정치인들이 한쪽에서 할 일을 다 했으면 다른 쪽에서 응답할 차례를 두고 “공은 넘어갔다” 고 합니다.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일만 남았습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말한 ‘섬들’은 이방나라들을 말합니다(사 11:11, 40:15, 42:4, 10, 12, 49:1).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4) 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섬이지만 특별히 우리 민족도 섬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른 것은 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도의 지리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북쪽으로 못 갑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실제로는 501마리였습니다. 1마리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끌고 온 소 값으로 501마리를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갑니다. 소 500마리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섬나라와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섬나라와 같은 이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주의 팔을 의지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는 소리를, 추운 겨울 산 속 토굴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칼과 총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공산당에게 손들지 않은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앙망하여 살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지켜 가야할 차례입니다. 받돈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본문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이 구원이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지만 이것이 제일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만일 구원이 폐하여 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땅을 살펴보세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기처럼, 하루살이처럼 사라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영원히 있고,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복음이 내게 도착했습니다.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주님의 팔을 의지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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