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의 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사람은 다 불쌍합니다. 제 친구 중에 제법 잘 나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한국에 왔습니다. 저는 성경타자 하냐고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에어버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왜 제가 정말 친구냐고요. 준혁이에게 물어보세요. 나이가 같으면 다 친구지요. 전용기 한 대만 온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보조로 비행기 두 대가 더 따라 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타고 다닐 자동차도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동차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보통사람은 줘도 기름 값 너무 들어서 못 탑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자기가 속한 민주당이 대패했습니다. 힘이 다 빠져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온 겁니다. G20 서울회의와 한미 FTA의 해결을 위해서 시간도 정하고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면서 타결 소식을 기다렸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 때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미국민들 입장에서 봐도 실망입니다. 먹이를 구해 가지고 가지 못하는 사자처럼 되었습니다.
거기다 G20 첫날 저녁 만찬을 하는데 각 국 정상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20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각 국 정상들이 자기가 맨 나중에 들어오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한 겁니다. 미, 중은 특히 기 싸움이 대단합니다. 일부러 10분 늦게 출발을 하고 도착해서도 보이지 않게 서로 나중에 들어오려고 기 싸움을 하다가 20분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대통령이 제임 기간이 제일 긴 브라질 대통령이 제일 나중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미국, 중국 정상이 안 오니까 먼저 들어온 겁니다. 그 때부터 다 꼬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2010.11.8)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을 “아시아의 기적”으로 표현하며 발전상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30년 전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멕시코보다 가난했다”면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이 말레이시아나 멕시코의 두 배를 웃도는 1만7000달러로 급증했고 올해 예상 GDP 성장률이 6%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실례로 삼성과 LG전자의 LCD 텔레비전 시장 지배, 4G 휴대전화 기술 선도, 현대자동차의 약진, 온라인 게임 및 대중음악과 같은 신(新)산업 성장동력 부상 등을 꼽았습니다.
이 잡지는 더불어 “세계화가 한국 경제 기적의 엔진 역할을 했다”며 1997년 금융위기 후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경영진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장벽과 편견을 없애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체제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라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외국의 영향을 경계하고, 직장에서 여성에 차별적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타임지는 나아가 복잡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교육 시스템, 북한의 위협 등 장애 요소가 있지만 “한국은 도전에 맞서온 나라”였다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낙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완벽해지고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란 없습니다. 미국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 움들을 극복해 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차별이었습니다. 흑백갈등입니다.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볼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달러를 너무 많이 풀어 세계 환율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임지가 말한 것처럼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전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이 땅에서 많은 것입니다.

미션(Mi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참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미션이라는 단어를 ‘도전, 힘, 교육’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했습니다. biavzetai, kai; biastai;(비아조(침노를 당함) 카이 비아스테스(침노하는))입니다. 비아는 힘입니다. 지식적 머리가 아닙니다. “힘으로도 못 가요”라고 노래했지만 사실은 무슨 힘을 말한 것이냐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힘으로 천국을 공략해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이며 그 이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 힘은 외면적 힘이 아니라 내면적 힘입니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입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힙입니다. 무력적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질문을 하고 말미에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왕궁의 힘이 아닙니다. 이 세상 왕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힘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보처럼 보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영혼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힘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올해의 최고 뉴스는 칠레 광부들이 살아서 올라온 것일 것입니다. 지하갱도에 622m지점에 갇힌 지 69일 만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감동을 안겼던 주인공들을 맞이하려 전 세계 1,700여명 취재진이 전 세계에 생중계 했습니다. 사고 발생 17일만에 처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최초에 사고 발생 17일까지는 광부들이 갖고있던 비상식량 이틀치를 가지고 48시간마다 1인당 참치 두스푼, 과자 반조각, 우유 반컵을 먹으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더 감격적이었습니다. 무슨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무슨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촌은 감동했습니다. 죽을 뻔한 생명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아주 강한 귀신이 들어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구하여 예수님께서 허락 하셔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다 죽었습니다. 이 일로 온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쫓겨나셨습니다(마 8:30-31, 눅 8:32). 귀신이 나간 한 영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도전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육은 인격변화, 인간변화에 치중하셨습니다.
지식전달 위주가 아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 없이 지식을 담는 것은 청소하지 않은 물통에 물만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을 집어넣어도 더럽습니다. 그릇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1-22)
바울은 선언합니다.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고 뭘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셋째, 인격적 관계형성을 통한 교육입니다. 부단한 접촉입니다. 예수님은 삼 년 합숙하셨습니다. 도제훈련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오랜 시간 교실에 앉아 있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한번 같이 가보면 압니다.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오래 교육해도 머리로 하는 교육은 머리만 키울 뿐입니다. 가정 교육이 왜 중요하냐 하면, 가정에서 인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인격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집니다.

넷째, 현장 중심으로 교육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팀을 구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갈릴리 어부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운동, 복음 사업이란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느냐,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하는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탈락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것 때문에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됩니다. 그럼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주간에 호산나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왕이 다 되신 것처럼 흥분해 있었지만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권력자들과 대결할 것이고, 우리가 이길 승산은 1%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는 뭐했냐하면 누가 우리 중에 크냐,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순진하게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다 모르는데 가롯유다만 압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길을 찾아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은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반한 것입니다. 그 만큼 가룟유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처럼 선생을 미리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머리도, 재주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앞서가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려고 선생을 판 것은 분명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사람의 수가 너무 빨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온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 미리 피해보아야 안됩니다. 피해도 정도를 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장점만 가지고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핵심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헌신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특징을 보면 원리를 가르치시고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무식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가끔 그런 표현 잘 씁니다, 무식한 게 통한다고요.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침노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힘’이지만 사실 ‘싸움’을 말합니다.
이삭이 60세에 쌍둥이를 나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창 25:26). 그 형 에서는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나 야곱은 대조적으로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편애하였습니다(창 25:27-28).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창 25:20-34). 그 후 야곱은 축복을 빼앗긴 형의 분노를 받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부모를 이별하고 1천 8백리 되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도망가서 타향살이를 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의 소원은 고향에 돌아가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형의 마음도 누그러졌겠지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최대의 경칭 어인 ‘주’라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고 낮추면서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전략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선물공세를 펴는 것입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는 피하라는 작전도 세웠습니다.
야곱의 이름에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이름처럼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야곱이 이것 때문에, 자신의 계책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형에게 줄 선물은 미리 보내고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2-28) 고 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악착같음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씨름을 하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에게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애 프로그램인 1박 2일인가에서 강호동이 하고 이만기가 씨름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서로 장난하면서 이만기는 20년 만에 처음 삿바를 잡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씨름 선수는 삿바를 잡아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답니다. 야곱도 감이 왔습니다. “이 사람(천사)은 나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기회입니다.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얍복강의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의 얍복강이 어디입니까? 주앙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천사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의 이 대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지만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 보다, 많이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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