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도화지를 한 장 씩 주고 가족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식구들의 얼굴을 그리는데, 한 어린이가 그 큰 도화지 한 가운데 엄마의 얼굴을 크게 그려놓고 그 밑에는 언니, 오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얼굴이 없어서 선생님이
“얘 아름아, 너는 아빠가 안 계시는구나?”라고 하자 아름이는
“아빠가 왜 안 계세요? 계세요.”
“그러면 왜 아빠의 얼굴은 안 그렸어?” 라고 하자 아름이는 도화지 뒷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뒷면을 보니 큼직한 얼굴이 도화지 뒷면에 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름아, 도화지가 너무 작아서 아빠의 얼굴은 뒤에 드렸니?” 그랬습니다.
“아뇨, 우리 아빠는 볼 수 없는 분 이예요. 아침 새벽에 나가시죠. 밤에는 우리가 잠든 후에 오시거든요. 우리가 못 보는 아빠니깐 안 보이게 뒤에다 그린 거예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이처럼 도화지 뒤에다 그려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면에 그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음성으로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데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설교를 위해 먼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책, 스가랴서, 말라기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제목도 주제도 먼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본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에만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정하는 것은 내가 미리 이것을 전해야지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직통계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는 B.C. 516년경 성전재건 이후로 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8장까지는 B.C. 520-518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나 스가랴 9-14장까지는 몇 십 년 이후인 B.C. 480-470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마지막 성경은 스가랴 9-14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가랴를 통해서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세례요한 때까지 아무 말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스가랴서의 핵심어는 ‘순종’과 ‘메시야’ 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시기 전에 이 땅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순종’입니다. 딸 가진 부모님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랑에게 딸을 당부합니다. 그 때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딸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남편들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서 고생은 시키지만 마음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요. 하나님의 이 당부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슥 1:3-4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불란서의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만드실 때에 그 마음속에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물질을 쌓고, 향락을 누리고, 명예와 권세를 얻음으로, 채워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고 쌓고, 누리고, 얻으면 얻을수록 인생의 갈증은 더 증폭되어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먼저 어느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은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입니다. 죄인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빛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셋째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종일 그 팔을 벌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냥 집으로 달아나지 마십시다. 벌리고 계신 주님 팔에 다 안기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는데 세 번째 취임사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원과 능력에 합당할 만큼 모든 국민의 안전과 기회와 지식을 보다 크게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들만 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육체를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는, 이 나라의 정신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하고 자원이 많으며, 정신적으로 아무리 미국이 좋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축복이 가장 귀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잘 살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영적인 삶이 죽으면 미국은 끝납니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겸손한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 이전의 어떤 왕도 ‘겸손’이라는 말을 경의어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독생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는 ‘겸손한 하나님’이라는 모순 어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또한 겁에 질려 따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 말과 회오리바람을 대동하신 채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작아지시고 작아지셔서 우리들이 태어나는 방법과 다르지 않게 난세포가 되셔서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 존 돈(John Donne)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존귀한 태중에 광대한 존재가 은둔해 있나니”라고 탄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산문투의 어법으로 말했습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A380이 지난 화요일(2009.12.15) 동북아 최초 인천~두바이 노선 투입되었습니다(에미레이트항공). 이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특급 호텔’로 부르는 2층 구조의 초대형 여객기입니다. 프랑스 에어버스가 제작한 것으로 전체길이 73m로 축구경기장 너비를 능가하고, 높이는 10층 짜리 아파트와 비슷하답니다. 이 비행기는 세계 4개 항공사에서 20대를 운항하고 있습니다. 한번 타는데 값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퍼스트 클래스의 항공운임은 약 25,000달러랍니다. 우리 돈 약 3천만원정도 됩니다. 제가 이거 타고 중동한번 갔다오면 우리교회 1년 헌금이 다 들어갑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성공회와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대단한 위엄과 찬란한 영화의 발자취였습니다. 러시아 크렘린 왕궁에 가면 공주들이 입던 드레스가 있습니다. 금실로 짠 금 드레스가 있습니다. 왕국에서 사용하던 금 그릇들과 마차들도 모두 금으로 되어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책도 겉 표지를 각종 보석으로 장식했습니다. 얼마나 보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지요. 대단한 나라입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영국 시장이 타던 마차도 금 마차였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던 유대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솔로몬의 저 영화로운 시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왕상 10:27)라고 말하던 그 시대의 강렬한 향수를 생각한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신은 너무나 위대하여 미천한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영국여왕의 행차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호원들과 호화스런 치장과 웅장한 팡파르에 맞추어 ‘의전품’들을 일일이 챙겨가면서 나타납니다. 영국 왕가 일행이 해외를 한번 방문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26억이랍니다. 이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의 이 지상의 방문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누우실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천사들의 방문이 있었고 빛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추운 겨울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목자들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비천한 부류입니다. 그들만이 이 광경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네 가운데 거할 것
슥 2:10-11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방법은 희생제물과 몸을 최대한 낮추어 이슬람교도들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하는 절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합니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절하는 방법입니다.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몸의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사실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지성소에만 잘못 들어가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관계를 끊고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두려워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두려워 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두렵기 이전에 친근하신 분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부자지간에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때는 친구같이 지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토론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어린이들하고 잘 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아 져야 합니다.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5)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말이 주역의 혁(革)괘에 보면 나옵니다. ‘군자는 표범의 털가죽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변해 가는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변해야 할 때 표범의 무늬처럼 확실하게 변하지만 소인은 겨우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자기변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감한 변혁이 필요할 때 확실한 자기변혁을 해야 합니다. 군자표변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354-430)이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19세 때 부모님의 동의 없이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의 이웃집에서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즉시 성경을 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이었습니다.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밝은 빛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뜨거워집니다. 밤새도록 회개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의 주홍 같은 죄가 사라졌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세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칭찬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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