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때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1)

여러분 앞에 몇 종류의 과일이 있다고 합시다. 딸기, 포도, 배, 멜론 등. 이때 무엇을 먼저 먹을 것인가? 사람들은 약간의 고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먹을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미뤄둔 채 아껴가며 먹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심을 안은 채 살아가는 동물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단거리 주자인 ‘치타(cheetah)’입니다. 이 녀석은 시속 125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1분 이상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비슷하게 생긴 표범과 달리 사냥감을 물고 나무에 오를 수 없어서 종종 애써 잡은 먹이를 사자나 표범, 하이에나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치타가 이런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만들어낸 식사 습관은 사냥한 먹이를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어치우고, 나머지는 땅 속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이런 ‘사바나의 법칙’은 형제가 많은 집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그런 집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냉장고를 열고, 먼저 먹을 걸 발견하면 다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 장땡이란 사실을 피부깊이 체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성향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미뤄두는 스타일입니다. 아껴먹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너무 아끼다 자기도 못 먹고, 남도 먹지 못하게 썩혀 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아끼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언제 쏟아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쏟을 때는 아낌이 없어야 합니다. 향유는 주인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다 쏟았습니다.

단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알고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일 것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4가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과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1. 생명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2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가 사람의 생명을 말한다면,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는 식물의 생명을 말합니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의 생명 모두를 하나님이 주관하신 다는 겁니다.

2. 흥망성쇠도 사람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3절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사람이 주관할 수 있다면 누가 죽는 것을 택하겠어요? 병들고 망하는 것을 택하겠어요? 다 흥하고, 다 성공하는 쪽을 택하겠지요.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지 못할 때 인간의 허무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죽고, 망하게 되는 겁니다.

3. 희노애락을 사람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우리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슬픈 때도 있습니다. 이걸 마음대로 주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두 가지를 다 준비해야 합니다. 슬픈 일이 아주 있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다 고민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께 맡기기 위함입니다. 슬픈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주님께 맡기세요. 욥과 같은 고백을 하세요.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것이니 순종하면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보세요. 단 3:17-18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건져 낼 수도 있고, 안 건져줄 수도 있는 겁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이에요?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믿음이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내 고집으로 못삽니다. 내 고집으로 행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4. 용도를 사람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집을 짓는 건축자의 마음입니다. 어떤 돌을 쓸 것인가는 건축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기에 못난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살맛 납니다. 우리 집사람이 가끔 저에게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5. 잃어버리고 찾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새것을 찾아서 기쁠 때가 있고요. 소중한 것을 잃어서 슬플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전쟁 때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할아버지 집에 가셨다 38선이 나뉘어져 북쪽에 갇히셨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 높은 눈 덮인 산을 7일을 걸어 남쪽으로 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북쪽에 가족들이 있는 겁니다.

6.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완전히 통제를 할 수 있다면 이 땅에는 사랑만, 평화만 가득할 것입니다. 지난 9월 22일 울산남부경찰서는 야산에서 떨어진 밤을 주인의 허락 없이 주웠다가 절도 혐의로 입건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야산인줄 알고 밤을 주웠다가 농장주인이 고발당하는 바람에 절도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됩니다. 결국 때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현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때’라는 단어가 29번 나온다고 했는데요. 그 중에 긍정적인 때가 14번, 부정적인 때가 14번입니다. 1번은 1절에서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때와 어려운 때가 교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일을 만나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름에는 “더워죽겠다.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고 겨울이 오면 “추워죽겠다. 언제 여름이 오지!” 그러고 살면 불행합니다. 오는 겨울을 즐기세요. 오는 봄, 여름, 가을을 기다리며 즐기면서 감사하세요. 감사하면서 산다는 것은 자연에,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사세요.
“시간을 낭비하기는 너무도 쉽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고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엄청난 금리에 놀란다.”(미야베 미유키)고 했습니다.

2.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때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겠어요? 우리보다 죄를 덜 지은 사람이어서 그렇습니까? 그는 간음죄에다가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시 51편을 보면 다윗의 회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솔직히 고백을 하면서 10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직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윗과 같이 정직 하라는 것”(왕상 11:33, 14:8)입니다. 왕하 18: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은 골리앗을 넘어뜨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 때문에 집을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업을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하기를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했나요?

3.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11절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땅만 바라보며 사는 삶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고, 영원을 바라보고 살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이름이 주앙교회 잖아요. 주를 바라보고 살라는 거예요. 결국은 영원한 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땅의 일이 허무하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경험을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그 어떤 잘못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오귀스트 로댕)고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엉망으로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그동안의 우리의 삶을 헛되이 만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요일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제가 좋아하는 지휘자 한 명이 있습니다. 이름이 좀 깁니다. ‘브루노 발터 슐레징어(Bruno Walter Schlesinger)’입니다. 솔직히 제가 음악을 잘 알아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지휘자이며 작곡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히틀러 시대에 음악을 하다보니 자기 국적을 가지고 음악을 계속할 수 없어서 나중에 국적을 오스트리아(1911년)로 바꿉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까지 장악하니까 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뉴욕필하모닉(1947-1949. 음악 고문) 지휘자가 됩니다. 여러분! 뉴욕필하모닉 지휘자는 세계적인 음악가만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죽을 때 한 말입니다. 그는 자기 생애를 뒤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음악이 나의 고마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구스타프 말러(1909-1911)’를 자기가 독립해도 되는 때에도 그를 끝까지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러도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였습니다.

말러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근대 독일의 최대, 최후의 낭만파 교향곡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입니다. 그의 부모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로 이주했고, 말러는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태어난 보헤미아는 현재 체코 공화국를 구성하고 있는 세 지방 중의 하나입니다. 체코를 동서로 나누어 동부를 체코 명으로 모라바(모라비아)라 부릅니다. 모라비안(Moravian)은 18세기에 이 지역에 살던 개신교인을 말합니다. 모라비안은 1725년에 로마 카톨릭의 탄압을 피해,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저에게 마틴 루터 이후에 개신교에 역사적으로 제일 큰 업적을 남긴 단 한 사람을 뽑으라면 저는 진젠도르프를 뽑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 의해 개신교인이 멸망을 당하는 그 때에 진젠도르프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체코의 한 지역의 땅을 사서 그리로 카톨릭의 핍박을 피하여 개신교인을 이주시킵니다. 이것이 모라비안을 태동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진젠도르프가 이러한 결심을 하게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가 1719년 네덜란드와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그림을 보고, 그 앞에서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그림의 이름은 ‘이 사람을 보라’(Ecco Homo)였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너 위해 이것을 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진젠도르프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결단이 모라비안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감리교의 뿌리입니다.

최고의 낭만파 작곡가 지휘자 말러는 모라비안 이었습니다. 신앙가운데 자라났습니다. 그의 제자 ‘브루노’도 모라비안 후예입니다. 둘 다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였습니다. 나중에 천재 음악가로 알려진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뉴욕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였던 ‘레너드 번스타인(1958-1969)’입니다. 이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진젠도르프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개신교를 카톨릭으로부터 살려냈습니다. 오늘날 현대 선교의 기초를 놓은 것도 이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를 알았습니다.
우리의 옥합은 그리스도께 쏟아 붇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현재에 감사하며, 늘 정직하게 살고, 영원을 바라보고, 주를 바라보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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