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뉴질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이 안된 아름다운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인구가 적기도 하지만 처음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산 것이 얼마 안됩니다. 겨우 천년 전에 남태평양의 마오리족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사리입니다. 고사리를 우리는 산나물로 알았는데 뉴질랜드의 고사리는 나물이 아니라 나무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사리 나무입니다. 고사리 나무는 뉴질랜드에 널려 있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주종입니다. 이 나무는 뉴질랜드의 국수입니다. 이 고사리 나무는 목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고사리 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오리족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사리 나무는 정 많은 아버지의 눈물처럼 이슬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찾아와 이슬 눈물을 흘립니다. 자식이 그리워서 울고 자식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밤마다 우시는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눈물을 먹고 자란 고사리 나무는 특수한 독성이 있어 주변에 독충도 해충도 뱀 한 마리도 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살아 계셔서 고사리 나무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자녀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에서는 야곱에게 아버지(이삭)의 축복을 빼앗기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축복을 야곱에게 다 해 주었기 때문에 상속 적인 의미의 축복은 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한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무한한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출 18:4)고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도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는 잃어버렸던 고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아버지가 없는 자녀를 위해 주말에 아버지 노릇을 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 주고, 잘 놀아 줘도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친구 목사님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어려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자기도 남들처럼 ‘아버지’라고 마음껏 불러보고 싶은 것이었답니다. 특별히 친구 아이들이 아버지 자랑을 하고 아버지가 무엇을 사줬다던가 어디에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핑 도는 눈물을 닦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은 무한히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야 그 삶이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치유 목회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골 어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시골에서 골목대장처럼 신명나게 동리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 아이가 오징어를 물고 먹으며 나타났는데 그것이 하도 먹고 싶어서 빼앗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집에 돌아가 부모를 데리고 이 목사님 집에 찾아와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 부모는 목사님에게 “어떻게 아이를 교육 시켰기에 남의 아이의 것을 빼앗아 먹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자기 아이를 야단치면서 “너는 공부나 하지 왜 항상 사고만 저질이고 다니느냐 너 같은 놈을 어디다 쓰겠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 너를 어디에 쓰겠느냐? 책망하니까 그 목사님은 아버지로부터 아름다운 추억은 하나도 남지 않고 책망 받은 나쁜 상처만 남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이 완전히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명나게 놀고 기가 살아있던 아이가 힘이 없고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나이 50이 넘도록 목회도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치유 목회 클리닉에 참석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의 받은 상처를 깨닫고 발견하고 치유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은 주일에 설교하다가 팔순이 넘은 아버지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고 사랑하고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교인이 다 함께 울어 버렸다. 그 날 별다른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온 성도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었어도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교육상 칭찬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책망하기보다는 잘한 것을 칭찬해 주면서 교육하면 됩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도 똑같습니다. 제가 인터넷에 사진 올려놓고 누가 좋은 사진 잘 보았다고 댓글 달아놓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또 댓글 달렸을까 궁금해서 또 가봅니다. 50먹은 목사가 그러는데 어린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인자로 오셨겠습니까? 우리를 칭찬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케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제자가 될 수 없는 바닷가의 어부들이 예수님을 쫓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듣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부이기 때문에, 못 배웠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도 주셨습니다.
백부장이 하인의 병 고침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할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이방인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의 아버지는 감동을 줄 때도 있지만 실망을 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 주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워 주시며 잔잔한 시냇가와 푸른 초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크리스천처럼 큰 축복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히브리인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가는 도중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그 등에 업힌 아이를 가르치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등에 업힌 아들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왜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업어 주지 않느냐?”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시 “업어준다고 아버지가 되느냐?”고 아버지란 것을 증명하라고 대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제가 95년도에 러시아에 갔습니다. 컴퓨터 교육하기 위해서 집에서 선교사님들이 컴퓨터를 자동차에 싣고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차를 조사하더니 컴퓨터를 보고 이게 당신 거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그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증명서가 있냐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자녀)되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현대인들도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서 사는 물고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세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한다고 즉각 벌하시고 채찍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 구실 못할 것 같다고 너무 성급하게 서둘 것이 없습니다. 눅 15장에 보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립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인내한다고 했습니다. 견딘다고 했습니다.
제가 육신의 아버지께 책망 받은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평생동안 아버지께 한번 야단 맞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대단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 한번이 마음속에서 지워질 수 없을 만큼 제 가슴이 남았습니다. 제가 시골 집 네모 귀퉁이에 앉아 있는데 밖에 나가시더니 낮을 들고 오시더니 귀퉁이에 있는 제 목에 낮을 들이대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찌 놀랐든지 무조건 아버님께 항복했습니다. 제가 부모님 말 안 듣고 살살 거짓 말 시키고 하니까 아버님이 저를 확실히 교육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요. 저는 아버님의 그 때 그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단 한번도 저를 책망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부모의 입장에서 어른의 입장에서 자녀들을 대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 편에서 인간을 보시고 이해하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참 중요합니다.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부모는 책망을 하기 이전에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선수였기 때문에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 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사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 번도 시합에 나가질 못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자신을 한 번만 출전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활약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맹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본문에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에 성경이 제일 많이 연결된 부분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말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장입니다. 전체 26절인데요 ‘아버지’란 단어는 무려 39번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은 같은 단어를 잘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단 한번만 나오는 단어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예수께서는 뿌리와 나무처럼 하나이시고 우리는 거기에 가지입니다. 그리고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다.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더 애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7)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섭섭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았는데… 지금 로마 속국에서 나라의 독립만 간절히 기다리는데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녀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출세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이 세상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다,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죽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의 물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까지 다 죽여버렸습니다. 삼손은 자기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인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