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에서 교만한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1-6)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 또 다시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홍수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서서히 평야지대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홍수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얼마동안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긴장은 풀어지고 점점 나태해져 안일한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은 우리를 쉬게 해 주기 위해서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짐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내 방법으로 살아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고 살면 편안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안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다음에 편히 쉬는 그런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짱이 같은 나태함을 말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본문 1절에 보면 화를 당하게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시온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둘째는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는 남쪽 유대 왕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의 사람들, 남쪽 유대인은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지켜 주신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조건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으니 그 성전이 지켜준다는 교만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란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그래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원에 확신을 가지는 믿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남 유다 보다는 4배 이상은 땅이 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없기 때문에 따로 사마리아 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교만합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든든한 겁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마치 이방 신에게 절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내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이 무사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웃 나라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본문 2절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변방입니다. 이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변방일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었습니다. 이 성읍들에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 뒤로 우리보다 가난한 자를 세계인 중에서 줄 세운다면 끝이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1950.6.25-1953.7.27) 끝난 당시 GNP 50$이었던 나라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최 극빈 나라가 100$-200$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GDP규모(2005)는 세계 12이며 1인당 국민총소득은 16,291$로 세계 29위입니다. 3면이 바다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사업은 세계 1위를 몇 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하고 FTA(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만큼 성장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2010년 11월 5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확정됐었습니다. 한때 G8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0%를 차지했으나 중국, 브라질, 인도, 한국 등 신흥 경제국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지금은 5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G20은 전 세계 GDP의 8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깜짝 놀랄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전기 불이 들어오지 않아 등잔을 키고 자랐습니다. 불과 40-50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의 인도차이나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제일 잘 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태국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70년대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꾸준히 성장은 했지만 우리처럼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식 성장은 어떻게 보면 비상식적인 성장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1회 아시안 게임을 인도에서 개최하였습니다. 1954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고, 1962년에 인도네시아, 태국은 무려 세 번에 걸쳐(1966. 1970, 1978)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살기도 바빠서 이런 국제대회를 치르는 것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국제연합(UN) 반기문 사무총장을 제8대(현재)로 배출했지만 미얀마는 아시아 최초로 제3대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을 1961년에 배출한 나라입니다. 당시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자국민들에게 ‘버마 만큼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역설할 정도였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얀마는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했고 준우승은 이란이며 한국은 조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1966년부터 1973년 사이에 한국과 미얀마가 치른 13번의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은 고작 2번 승리했고 무승부가 5번이며 6번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축구에서도 우리는 미얀마는 경계대상이 아닙니다. 축구에서는 브라질하고 하려고 합니다. IT와 경제에서는 최강국들과 겨루고 있습니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기도한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셔서 잘 살게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나라 5000년 역사이래 지금처럼 잘 살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본문 4절에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라고 말합니다. 아직 소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한 때 못살았다가 갑자기 잘 살게되니 우리 자신도 놀랐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우리 자신들이 혼란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에 한이 맺힌 분들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탈북한 분이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당 간부 집에나 소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답니다. 남한에 내려와 정착하고 작은 아파트를 나라에서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이사가는 분들이 버리고 가는 소파가 수시로 나오는 겁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제일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소파 있는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린 소파마다 집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온 집안이 소파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부터 소파를 도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정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군부가 정치를 할 때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를 위해 함께 생각할 때입니다. 무슨 어린아이들처럼 자기 마음에만 안 들면 나 놀기 싫다고 장난감 팽개치고 나가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사고, 내가 키우는 양떼와 소떼에서 살찐 것을 잡아먹는데 왜 그것이 왜 나쁩니까?”라고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멋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죠. 여러분들이 정말로 다 부자로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아는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에 ‘허벌’이란 말이 있습니다. ‘몹시 굶주려 있거나 궁해 체면 없이 함부로 먹거나 덤비는 것’을 말합니다. 권력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돈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허벌나게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 일전 제가 태어난 동네에서 병원(마석기독병원)을 하시는 원장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큰 병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십 명의 직원이 있는 병원입니다. 이 원장님은 병원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름도 기독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체보다는 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통해서 알게된 선교지로 봉사를 나가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권입니다. 자신이 이슬람을 아시는 것이 없으니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슬람에서 하는 라마단(금식)을 하시기로 작정하고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낮에는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금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갔다가 밥도 못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이 강력한 이유를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은 이 라마단 기간을 통해서 단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상아 침대에서 안일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적은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다시 매야 합니다. 예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향락에 빠져 다가올 심판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5절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고 하십니다.
“지절거리며”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포르팀’입니다. 부숴져 떨어져 나간 것을 말합니다. 의미가 전혀 없는, 자신도 모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다윗은 사실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삼하 23:1, 대상 23:5, 대하 29:26). 그러나 본문은 자기들의 잘못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악기를 만듭니다.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에 빠지면 안됩니다. 복음을 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사치와 방종에 빠져 있으면서 다가올 재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얼마 안 있으면 나라를 빼앗기고 망하는데도 지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또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소록도 교회에서 10년 목회 하시고 지금은 필리핀 나환자촌에서 선교하시는 김명환 선교사님입니다. 소록도에 들어갈 때 1,2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했는데 10년 동안 800명의 장례를 치루었답니다. 4-5일 마다 한번씩 장례를 치룬 것이 됩니다. 늘 죽음 곁에 있는 겁니다.
부흥 강사님을 모셔서 설교하는데 여름에는 냄새가 너무 나서 그분들이 설교를 못하시고 잠깐 나갔다 올 깨하고 나가서 못 들어 오셨답니다.
김 목사님은 7년째 되는 어느 날 새벽 기도회시간에 “하나님! 저도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터져 나오는데 소록도 성도들이 그 기도 소리를 듣고서 “목사님! 목사님도 이제 우리와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 자유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박완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소록도 주민에게 피해 보상하여 돈이 들어오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10년의 소록도 경험으로 중국으로 가 나환자를 돌보다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썩어 가는 나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고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불러들였습니다. 동생은 성결교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부모님을 또 필리핀 나환자촌으로 모셔갔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서 평생 경찰생활만 하셔서 80평생 남에게 얻어만 먹었지 주면서 살지를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뭐든지 먹고 나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이 한국에 있는 5천만원짜리 집 팔아서 필리핀 나환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유치원을 세운 것입니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의 유언대로 필리핀 나환자촌에 묻어드렸답니다. 그리고 유언하시기를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에서 만날 때, 마지막까지도 나병환자를 위해 선교하다 왔다고 하면 좋겠다”하고 돌아가셨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고 합니다. 겁나면 못나갑니다. 어느 시인은 “하나님은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장영희)고 했습니다.

말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뛰려고 하고, 또 실제로 달릴 수 있는 아프리카 얼룩말은 초원을 뛸 때만큼은 표정이 환해진답니다. 심장이 터질 듯 ‘헉헉’대면서도 표정은 늘 밝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얼룩말의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때로는 힘이 들지만 영혼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나무를 키우는 분들은 잘 압니다. 나무는 언제나 빛을 따라 가지를 뻗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요 1:5).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요 3:21)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빛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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