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재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웃에 사는 47세 된 한 분이 할머니와 계약을 하나 맺었는데요. 매달 2,500프랑을 드릴 테니 돌아가시면 할머니 집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매달 40만원인데, 할머니가 1년 안에 돌아가시면 400만원에 집을 얻는 것이고, 2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얼마 안되니까 집 한 채를 그저 줍는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10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110세가 되어도 돌아가실 기미가 없는 겁니다. 12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그러다가 이웃집 양반이 먼저 죽었습니다. 30년을 기다리다가 돈만 들이고, 77세에 먼저 죽었습니다. 물론 할머니도 이웃 양반이 죽은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언제까지 살게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하물며 주님도 모르신다고 한 세상 심판 날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겁도 없이 자신이 안다고 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뒤질 소냐 한몫 했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예언했다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통일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통일교 때문에 이 말을 기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이단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훼손하고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사탄의 전략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이단의 재림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눅 17:26) 또한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의 커다란 두 개의 심판 사건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재림하실 때 심판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6:5-7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셨으면 다 죽여버리기로 작정하셨겠습니까?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 1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코웃음을 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재림의 날짜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가 점차적으로 심판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다시 오십니까?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릴만한 여우가 없습니다. 한국말에는 미묘한 느낌을 담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당장 쓸 작은 자잘한 물건을 살 때는 그냥 ‘산다’고 하는데 그것이 좀 크거나 여축성을 띤 것이면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같은 쌀이라도 한 됫박의 쌀은 산다고 하고 한 가마는 들여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 사용할 물건을 살 때는 ‘장만한다’고 합니다. 장만이라고 하면 그 집안의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물건과 달리 자가용을 사게 되면 ‘굴린다’고 합니다. 바퀴가 달렸으니 당연히 굴리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벤츠를 굴리고 케딜락을 굴립니다. 단순히 비싼 차를 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타는 것이 아니라, 허세를 위해 굴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허세를 위해 굴리는 믿음이 되면 안됩니다. “복음은 허세를 위해 굴리지 않는, 복음을 위해 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허세도 허풍도 가식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우리나라 조선시대 집들은 대문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집들이 굴뚝을 크게 만든 것하고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선포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심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긍흉은 선포되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롯의 때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가 구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전쟁 때 제1한강교 폭파할 때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폭파할 것이니 건너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무시하고 건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경고하는 전단지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전쟁에도 최소한의 율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권위주위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깨버려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모든 권위를 깨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청소년들은 대화 자체가 거의 욕으로 소통되고 있습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땀흘려 돈을 벌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요행만 바랍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불만만 싸여갑니다. 한번은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담탱이”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담을 타고 자라는 식물인지 알았습니다. 한참을 들으니 자기 담임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존경할 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훌륭한 부모님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모에게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이것이 당위성이며 최소한의 율입니다. 옛날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싸움을 하다 잡혀갑니다. 장수를 잡으면 전쟁중이지만 경례를 하고 잘 죽이지 않습니다. 관우나 장비도 잡힌 적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상대 종족을 다 죽여버리는 학살 소식을 들을 때, 야만인임을 느낍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폴포트가 대량학살을 하는 사건을 보면 어떤 존경심도 관용도 없으며 오직 무지함과 잔인함, 천박성이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그런 야만성을 보이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자에게는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앞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5-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수 없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이나 민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못 들었다고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도 했습니다.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인 그리스도께서 재람하실 때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어떤 분들은 천국이나 가려고 예수 믿냐고 그럽니다. “천국이나가 뭡니까?” 그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떻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옥은 가면 안됩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 몇 번 갈아타면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꼭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봅니다. 돌아 올 때는 ‘인천이나 서울’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국말로 ‘천국’이라는 말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겸손의 어린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째 재림은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오셨던 것처럼 또한 재림하실 것입니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9-30)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냥 서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다음에 해야할 일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북한의 어느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시골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맡은 선교사도 더 이상 돈을 얻어올 때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다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기도하시다가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에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완공을 하였는데요. 교회는 다 지어졌지만 문제는 그 집사님 가정입니다. 전답을 다 바쳤으니 어떻게 먹고삽니까?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 집사님을 교회 사찰로 삼으시고 교회 안에 들어와 살게 하고, 작은 돈을 주며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애들 교육이 또 문제였는데요. 마침 선교사님이 그 집 아들을 미국에 아는 분에게 소개하여 유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들어와 아주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백낙준(1895-1985) 박사입니다.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축복하신 겁니다.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백사경:시각장애인)는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그런 짓만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 양반아, 당신이나 잘 믿지. 별것 다 간섭하네. 재수 없게.”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만 자면 그 말이 들리는 겁니다.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니 순 거짓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전부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 한마디하면 그 한마디가 그 마을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시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었으니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우리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왔다가 그 때 통역관으로 동승한 토마스 선교사 잡혀서 죽게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한마디합니다. “예수 믿으시오.” 그 때 그 사람은 예수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 안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라는 말 한마디를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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