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찾는 사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8:3-9)

시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자신이 잡혀가시기로,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께 나오셨습니까?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주일학교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얘 토미야! 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목사님은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것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녜요, 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본 일도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선생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수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성 곁에 가본 일도 없다며 자기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 말을 듣던 수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 거예요,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 예요, 그 애는 착하고 얌전하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날 예배 후 당회가 모인 자리에서 그 얘길 꺼냈습니다.
“장로님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니까 토미는 성 곁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수잔나 선생은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만큼 힘도 없고, 얌전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재정담당 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건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재정으로 수리하도록 하십시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지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왜 예수께 나와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고 칭찬 받았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들 자기들의 생각과 욕심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회당장 야이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 수로보니게 여인 등 복음서에 기록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친히 만지시거나 안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체험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사도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바디메오와 같이,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에 들렸다가 놓임을 받은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며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한 이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가정으로, 생활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시면서 너희가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듣게 됩니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문제가 해결되면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와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을 목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우리는 신앙이 성숙해지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기적만을 바라는 패역한 세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더욱 성숙한 사도, 능력 있는 사도로 세우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세 번이나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야 됩니다.

둘째, 자신의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율법사, 부자 청년 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또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등입니다. 지극히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자기 의를 나타내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인정받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면 떠나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그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가 가진 의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불안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의 인생을 매우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나올 때는 자기 의를 들고 이를 확인 받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이룬 공적이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나오면 안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며 나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에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 같으나 언제나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 목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올라와 자신의 죄를 들고 가슴만 치고 내려간 세리처럼, 자신의 의가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죄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벽에서 자신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런 보이고자 하는 행동을 질타 하셨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무릎꿇기 위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군인들과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첫 번째 본문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을 잡으려 하거나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런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요 8:59, 10:39). 그러나 오늘은 피하려고도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 확인시켜 주시면서 자신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신변에 위협이 다가올 때 피하신 이유를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음으로”라고 말씀하시고, 오늘은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저들에게 밝히신 것은 주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의 안내에 따라 예수님을 찾아온 군인들과 하속들이, 왜 나사렛 예수를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손에는 칼과 창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되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이렇게 그 손에 무기를 들고 옵니다. 그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때리고 찌르고 흩어지게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비밀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의 복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에게 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 19: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도들까지 모두 두려워서 도망한 그 자리에 아리마데 요셉은 값비싼 세마포를 들고, 니고데모는 몰략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근)쯤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사도가 되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 왔을 때 왜? 세레요한에게 찾아갔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고 하시면서 “선지자를 보러 온 것이면, 오기를 잘했다. 지금 너희 앞에는 선지자보다 더욱 크신 분이 서 있기 때문이다(마 11: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부드러운 옷은 권력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즐거움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세상 즐거움을 버릴 때 하나님 말씀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고,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말씀을 들을 때 영생에 관한 소망이 생겨나며,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새들의 나라가 온통 술렁였습니다. 며칠 뒤 새들의 왕을 정하기 위해 모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제 털을 우아하고 멋있게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치장도 안하고 멀리서 구경만 하는 새가 있었습니다. 까마귀였습니다. 아무리 물로 닦아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닦고 간 그곳에 깃털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만 모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까마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그것을 풀칠하여 하나씩 붙여나갔습니다. 각양 각색의 털을 붙인 까마귀는 찬란했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모두들 다듬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휘황찬란한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아름다운 새가 있다니… 감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시선이 정체불명의 새에게 쏠렸습니다. 까마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까~악!”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새들은 모두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어! 이건 까마귀 소린데?, 어! 그러고 보니 까마귀가 안보이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몸에 붙어있던 깃털 하나가 떨어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 저건 네 깃인데…”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가만히 보던 새들은 순간 달려들어 자기 깃을 다 뽑아갔습니다. 당황한 까마귀는 “까악 까악”하며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이솝우화)
우리가 까마귀처럼 꾸미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왜 예수님을 왜 찾아 왔는가? 육신의 문제만을 위해서 찾아왔는가? 내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왔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오셨는가?
우리는 확실히 “아닙니다.”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는 세상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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