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5-17)

적진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검은 베레모의 특수요원들은 훈련을 늘 실제와 같게 합니다. 일년에 절반이 실제상황처럼 훈련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작전 나가면 비에 젖어 힘들지 않느냐?” 요원이 대답하기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이왕 고생스러운 것이라면 선을 행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어나 다시 달리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합니다.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나는 누구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인가? 자기의 주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보는 겁니다. 그 명령에 따르는지 보면 압니다. “주”를 길게 부르면 “주”에서 “주님”, “주인님”이 됩니다. 목사들이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노릇 해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시대 때나 예수님 시대에는 거의 한번 종이 되면 평생을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종에서 해방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가끔 탈출을 시도하는 종이 있는데 잡히면 죽거나 더 심한 고통스러운 일이 맡겨질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해상이 발전하여 배 밑에 들어가 쇠고랑을 매단 채 평생을 노를 저어야 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찬송가 305장을 쓴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바로 이런 노예를 팔고 사던 사람이었습니다. 뉴톤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가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납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뉴턴은 자기가 지은 죄가 하도 커서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파도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 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종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종의 운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제일 바보 같은 짓이 사단의 하수인으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사주신 선하신 우리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 하반에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십니다. 준비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포시 산본은 ‘피겨 요정 김연아’의 고향입니다. 바로 옆에는 ‘수영선수 박태환’의 고향 안양입니다. 우리 집사람 학교 동창이 박태환의 어머니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연아, 박태환 같이 될래요?” 하는 아이들을 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고된 연습은 생각지 않고 그들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김연아는 한 해 300일 가량을 훈련합니다. 빙판에서 하루 300여 회 점프훈련을 합니다. 1년이면 약 9,000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점프하는 셈입니다. 점프 성공률은 80% 정도이니까 1년에 점프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 횟수가 1,800번 정도입니다. 차디찬 얼음바닥에서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찧으며 다시 일어나야 하는 어린 소녀를 기억해 보세요. 회전하려 애쓰는 척추, 착지를 위해 회전력을 잡아 줘야하는 골반의 상충작용으로 피겨 선수는 온몸에 골병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모진 훈련 끝에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디즈레일리
성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천재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준비하는 자에게 본문은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ajlla; meta; prau?thto” kai; fovbou,) 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원문에는 두 단어가 더 있습니다. “ajlla; meta”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언어적 대답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으로 대답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헬라어의 온유(prau?thto”: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을 뜻합니다(딤후 2;24, 25). 두려움(fovbou: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안됩니다.

스코틀랜드 설교가 매더슨은 자신의 전도집회에서 회심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읽을까요? 그들은 여러분을 읽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를 알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활과 행동방식을 아주 샅샅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이 하는 말과 어긋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하면, 마귀가 이일을 트집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본문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 선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여기에 보면 쌓입니다. 선도 쌓이고 악도 쌓입니다. 잘 우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체적으로 공감하시지요? 잘 웃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요 감정이 사라져 갑니다. 주님은 악한 세대를 가리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고 하셨습니다. 유머는 이요 마음을 열어야 만들 수 있고 보인다고 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면 유머가 보이고 행복해 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머니랑 결혼하겠다고 버팁니다. 아버지가 뜯어말립니다.
“그건 안 돼,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란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그럼 아버지는 왜 우리 엄마랑 결혼했어?”
구약의 히브리어는 선한 것과 좋은 것과 기쁜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바로 ‘토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은 겨울에 입었다가 여름이면 벗어 던지는 외투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편하면 택하고 불편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은 벌써 한국인으로부터 오래전에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몸담고 사는 내 나라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새벽 한 시, 두 시에 나무를 짊어지고 오십리 떨어진 시장에 가면 아침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이 됩니다. 그 일을 늘 반복했는데 어느 날 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예수 믿으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분은 한쪽 눈이 없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남의 집 머슴입니다. 천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로는 상놈중의 상놈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불쌍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집안에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온 마을이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온 마을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습니다. 한쪽 눈이 없었던 나무꾼의 아들은 장관이 되고 방송국의 국장이 되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마을에서 목사만 18명이 나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의 기적은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살립니다. 고칩니다.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면 다른 것이 주가 됩니다. 여러분! 그깟 돈을 주로 삼으시렵니까? 아니면 아파트가? 아니면 세상 출세가? 다 별것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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