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입은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롬 1:1-7)

이탈리아의 격언에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또 많아 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많아진들 가라지 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것으로 아무리 심어도, 갈고 닦아도 사람의 것일 뿐입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기준이 그저 돈 많이 벌고 명성을 얻으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갖은 방법과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적인 관점에 벗어나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 시각이 예수그리스도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입니다. 내 눈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도, 주님 앞에서도 여전히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일수 없습니다. 자! 오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은 곧바로 “아담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고 부르시면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실 때와 동일한 마음으로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를 찾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고 계신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의 부르심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첫 번째, 일반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러 주시는 부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고 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구원를 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아온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구별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부름을 받은 자들의 무리입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은 자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본문 7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구원의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사실상 두 번째 부름을 받은 사람들 역시 여기에 들어갑니다. 첫 번째 부름 없이 두 번째 부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려고 특별하게 부르시는 부름을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구원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시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 43:1)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준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두 번째 부르심을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아무나 부르시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을 쓰시는 분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겸손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간 교육받아 문무를 겸비한 모세를 그대로 쓰시지 않았습니다. 나이 40에 애굽의 문화를 통달하여 말과 지식이 능숙했지만 그는 교만했습니다. 권력이나 지식이 있어도 교만한 자를 주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교만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애굽 사람만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곤욕스런 40년을 이방의 객으로 외롭게 지냅니다. 애굽의 바로 궁에서 살아온 날만큼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갑니다. 이 기간은 혹독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먹던 그런 호화스런 생활이 아닙니다. 모세가 달라지려면 그 기간만큼이나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어느새 80이 되었습니다. 나이 80에 기력도 쇠진하였고 미디안 광야의 목자의 생활에 이젠 인간적인 자신감을 몽땅 사라졌습니다. 몸도 늙고 기력도 쇠진하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겸손하니 부르신 것입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온유 겸손할 때 주님이 그를 높이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할 때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릎을 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보다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겸손함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상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순종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안됩니다. 못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만 하면 정말 안되고 못합니다. 네 힘과 지혜와 지식과 학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이 할 말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입에 넣어 주십니다. 죄는 사해 주시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인데 아람어로 ‘게바’(바위)라고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유대식으로 시몬은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겸손해서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민이 사용하는 아람어의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고산 윤선도(1587.6.21)은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배신자 같았지만 그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공무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도 ‘레위’(막 2:14, 눅 5:27)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레위는 ‘연합’인데 마태는 세상과 연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는 ‘마태’가 되어 살았습니다. 마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마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와 세속에 살면서 이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레위를 불러 마태로 만드셨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이전에는 시몬과 레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사람이었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름이 바뀝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순종함으로 제자가 됩니다.

셋째,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은 사명의식이 분명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은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노나라의 왕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이사를 한 뒤에 자기 아내조차 잊는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그정도면 건망증이 심한 것은 아니지요. 정말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불렀는지 내가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부르심과 택하심”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한다면 “사명감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나를 왜 불렀는지, 왜 선택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십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보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손에게 복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2장).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그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이 되고 새벽 별같이 빛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구약에 선지자중에 아모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거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마샤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말은 그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집안이 아니며 선지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모스는 평신도 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을 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 그래서 아모스는 신학적이거나 다듬어진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기 식으로 예언하며 꾸짖습니다. 사마리아의 궁에 가서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4:1)고 말합니다. ‘암소’는 고집센 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드고아를 출발하면서 주변 나라들(다메섹, 두로, 에돔, 암몬, 모압)을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까지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이방인에 대해서 멸망할 것을 예언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유유히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유다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예언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살던 사람이 망하면 더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망하면 더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도 더 혹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평신도 선지자 였지만 자기방식으로 훌륭히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야 내 발이 이곳으로 나왔지요” 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전등이 어떻게 켜졌습니까?” 하는 질문에 “스위치 올리니까 불이 들어 왔지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발전소나 변전소의 존재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대답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미국의 어느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를 트니까 물이 콸콸 나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귀해서 그 수도꼭지를 뜯어 가지고 아프리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이만큼이라도 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끊임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대답이 있습니까?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것으로 안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를 성도로,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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