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까지 자랄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느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성질 급한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기사님, 이 똥차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네 손님, 똥이 다 차면 출발합니다.”
우리 속담에 “내가 똥 눈 우물물을 내가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마치 고기가 “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는 것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던 방법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방향을 변경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회개를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의 제자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경교육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하여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경을 보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주일학교 운동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그 목적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 학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반드시 손이 가야합니다. 잡아 당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바지가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절대로 저절로 혼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흘러 내려갔던 바지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져 간 것을 다시 찾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 성이 있어서 마치 바지가 저절로 흘러 내려가듯이 내려가기는 하지만, 저절로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교육을 통해서만 흘러 내려갔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병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물에 큰 고기 없고, 마음 적은 사람 큰 성공 없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물가로 가야합니다. 크게 키우려면 큰물로 보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일 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마 12:41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제일 크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예수를 작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인지, 오늘날 우리 교육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제일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1952년 미국교회협의회 안에 기독교교육부 특별위원회에서 5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목적을 발표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 기독교적 공동체와의 생동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음과 같은 것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 발달 단계에서, 신적 창조물인 자신의 높은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성숙을 향해 성장해 가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대상으로 보면서 저들의 가족, 교회, 그리고 다른 개인과 단체들과 더불어 기독교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보다 나은 이해와 각성을 얻도록 하여 그 가치들을 보존하고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활용하는 책임을 수락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증진시켜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유산들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국내외 선교에 성실히 참여함을 통하여 기독교적 친교 속에서 책임적인 역할들을 발견하고 수행 할 수 있게 할 것.

여기에 보면 각 항목의 끝나는 말에 모두 “도와 줄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나만 잘되려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도와 달라는 기도, 자기만을 위한 축복 언제까지 이런 교육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를, 노약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고 했습니다. 도와 주라고 만든 거예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 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했던지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이에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라며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도우며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지만 선교회는 여러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하기 이전에 먼저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앙교회 또한 늘 개인과 교회,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교회는 안됩니다. 우리 집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축복은 안 됩니다. 혼자서 선교 다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 중에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가 있습니다. 모달리티가 교회라면 소달리티는 선교회입니다. 전방과 후방, 보수와 진보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과 축복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협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성장과 축복은 협력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북 유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에서 육로로 핀란드로 넘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사진 찍기가 겁납니다. 그리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핀란드, 스웨덴 사람은 다른 거예요.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튀어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절대 필요 없이 빨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여자들이 먼저 나가고 차근차근 남자들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온 나는 뭐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 나온 게 아니잖아요. 뛰어나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기 미안해서 그 사람들의 시아에서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계속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 자신을 기억합니다.

본문 14절 하반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뜻하는 speed는 본래 성공과 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서양 철학입니다. 우리말에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이 원래 빨리빨리는 아닙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비가와도 그 비를 맞을 지언정 경고망동하고 촐삭 맞게 뛰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배자인 일본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조급하게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대로 한 복판을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어 과연 누가 식민지인인지 모르겠다”는 술회도 있습니다. 빨리빨 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을 이끌고 있다고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인터넷 속도, 컴퓨터 속도, 핸드폰을 6개월만 바꾸는 나라라고 미국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심리학자에 따르면 속도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리적 속도, 사회적 속도, 개인적 속도입니다. 개인적인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돌라가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바느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얼마나 급해졌는지는 애국가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대개는 “길이 보전하세”의 끝 소절이 끝나기 전에 다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국가가 길이 보전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가마다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뒤에 있는 차가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동경의 경우 4.5초 기다려 준답니다. 서울의 경우 1초 기다려 줄까요? 어떤 사람은 신호등이 지금 막 바뀌었는데 크락션을 누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지 않으려고 것입니다. “요동치”로 번역된 ‘클뤼도니조메노’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꾸만 흔들립니까? 반석(바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합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도울 일, 하실 일,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복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발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나님이 당첨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다 복권을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다 못해 사과나무 밑에 가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지는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을 여세요. 움직이세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