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2-24)

몇 일 전에 제가 치과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자존심에 상처받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 죄송합니다만 치과에 가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픈 이가 닫도록 입을 잘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치아가 아프니까 나도 모르게 그 치아가 닫지 않도록 입을 다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픈 이가 닫도록 여러 번 입을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나는 잘 따라 한다고 했는데 의사 마음에는 잘 안 들었나봐요. 그 의사는 저에게 말하기를 “지금 옆에 환자 치료하다가 왔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러는 데요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누워있는 저에게 “눈 떠보세요. 자꾸만 제가 시키는 대로 잘 안 따라 하시면 안됩니다.” 저도 마음에 자존심이 상하고 의사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저에게 아주 비하하는 말투로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는 식의 질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두 번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치과에 갔다가 그런 경험을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그래서 치아가 아프면 두 번 아픕니다. 치아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어떤 치과를 가야하나 고민에 빠집니다.
치아에 대해서 최 집사님하고 대화할 때 그러시는 거예요. 치과 의사 선생님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는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 극성스러울 정도로 이빨을 닦게 하고 자기들도 특별한 칫솔을 사용해가며 관리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는 거예요. 치아가 아프면 얼마나 고생하고 치아 때문에 받게될 고통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준혁(4살 남)이가 지난번 밥통에서 나는 김에 손을 대서 약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케이크 사면 주는 아이스에 물을 부면 나오는 하얀 김을 보더니 “뜨거워, 뜨거워”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럽니까 경험을 한 것입니다. 준혁이는 그게 뜨거운 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경험을 한 사람은 알기 때문에 산 증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갈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픈 것 정말 못 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지옥이 어떤 곳인데 그곳에 갑니까? 절대로 못 갑니다. 가면 안돼요. 여러분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곳을 아시는 주님께서 증거하시잖아요. 오직(ma’llon:말론) “더욱” 이라고 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 입니다. 다만(ajlla;:알라)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그곳에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의 산 증인이십니다.
본문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증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지옥에 가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심각한 책입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서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영혼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생활 하는데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교양도 닦을 수 있으면 닦아야지요. 그런데 절대 잊지 마세요. 나의 육신의 안일함이나 즐거움 때문에만 절대 교회를 다니시면 안됩니다. 교회는이요 나의 영혼을 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스스로 이런 농담을 한답니다. 가령 독일 사람,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핀란드 사람에게 코끼리에 관한 책을 써 보라고 하면 어떤 책이 나올까?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독일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이라는 책의 제목으로 주석이 빵빵하게 달린 학술서를 쓸 것이고, 철학과 존재론적 고민에 자주 빠지는 프랑스 사람은『코끼리의 인생과 철학』이라는 책을,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미국 사람은 『꼬끼리로 돈 버는 법』이라는 책을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은『코끼리는 핀란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책을 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은 어떤 책을 쓸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방법』또는 『코끼리의 맛있는 부위』등의 책을 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나의 인생 철학이 개입되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어떤 인생철학을 발견하는 책도 아니고 그런 것에 이용하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얼마나 지금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인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영혼보다 더 급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구하러 가는 일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옥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실물설교는 무디 목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교회근처에 나가서 살아있는 거미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 앞에서 그 거미줄을 잡고는 거미에게 성냥불을 붙여서 가져다 댄 것입니다. 거미는 그 뜨거운 불을 피해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 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지옥 불은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그 날 그 설교를 들은 아이들은 지옥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간접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은 증인들의 책입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행 4:1). 증인들은 죽음을 불사합니다. 더 이상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데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증인’, ‘증거’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리아’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 Martyr(마르첼)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발음하게 될 때 순교자가 됩니다. 영어로 증인을 순교자로 옮긴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죽어도 부정하지 않은 겁니다. 증인이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 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사건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오니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순교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제일 진실해 진다고 합니다. 내세가 없고, 영혼이 없다면, 아무 유익도 없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짓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요.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공식적으로는 베드로가 제일 처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제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은 자꾸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이 진실이냐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면서 마태복음 27: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럽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65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옷을 찢고 격분합니다. 그러면서 더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마 27:43)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마 27:11) 라고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총독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만 관심이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지는 않았겠지요. 대제사장도,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믿기는커녕 그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지만 이 말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뿐이 없다는 것예요.
왜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증거 하신 모든 말씀이 진실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면 예수께서 하신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그래서 순교할 수 있는 겁니다.
레위기 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라고 합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잠 14:25).

사도행전을 마친 후 초대교회 시대 로마 황제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치하인 202-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두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라는 20살이 약간 넘은 귀족 여성과 그녀를 돕는 여성 펠리키타스(Felicitas)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직 경찰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귀족 아버지가 찾아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집안을 택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처형 날, 미친 소를 풀어 싸우게 하였고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 하였고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습니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생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산 증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신 말씀이 페르페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 순교한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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