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사다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2-3)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의 잠자던 믿음이, 신앙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같이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햇빛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영이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의 경제를 두고 부활을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 아프리카의 나라들 보다 더 가난했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아이티(카리브해) 같은 나라였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질병에 장애자에 가정의 궁핍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도 먹기 살기 힘드니까 겨울이 지나고 보리 추수가 있기 전까지 ‘보리 고개’ 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을 무사히 넘겨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봄나물이 나와야 그거라도 뜯어먹고 사는데 그 전에는 먹을 것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배춧잎 말렸다 먹는 것 씨레기라고 하나요? 좀 오래도록 버티기 위해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만든 것입니다. 쑥이나 길거리 질갱이도요 다 뜯어다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먹어보고 죽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먹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에게 하와에게 왔던 뱀이 와서 꼬였다면 한국 사람은 그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먼저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에서 골도 먹고, 심지어는 욕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1960년대 처음 수출한 품목이 뭐냐하면은이요 가발입니다. 가진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 길러서 다 잘라서 같다가 파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남자에 의해서 경제의 밑바탕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다 자른 거예요. 처음에는 숙식만 제공해 주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녔습니다. 한 집에서 누군가는 희생을 하여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많이 배웠다고 뽐내기 전에 나 때문에 배우지 못한 언니, 누나, 오빠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공부 못하여 사회에서 멸시받고 공순이, 공돌이라고 부르던 분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경제가,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은 섬유와 의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지하공장 같은 곳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는 일부 기업주들은 근무 시간에 용변 보러 가는 것이 횟수가 많아지면 이윤을 축낼 수 있다고 하여 노동자들에게 국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나라가 아닙니다. 의류나 수출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동전화, 평면TV, 자동차를 수출하는 하이테크 강국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이티 같은 나라가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제성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서양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에 한국의 국가 원동력을 만들었는데요 그 대표적인 기업이 포항제철(포스코)입니다. 한국전력, 한국통신(KT)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만든 기업입니다. 한국이 IMF을 경험한 것도 외환시장의 개입을 적절히 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사실 한국은 전혀 자유주의 시장체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단 이것이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선진국은 보호무역장벽을 두텁게 사용하며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신흥경제국가 들에게 신자유주의 무역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의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는 정작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 고 질타했습니다.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다른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자기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경제 논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가는 사다리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다리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세계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십자군형태의 복음전달 때문입니다. 무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점령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웃 국가와 좋은 관계에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국가입니다. 아제르바이잔을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배를 갈라 십자가로 표시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십자가를 민족의 원수로 알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전쟁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전 세계에 비슷한 방법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 나라를 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식민지화하면서 남자들을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똑똑해져야 대모나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무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 없으면 사람이 안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잘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해도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카톨릭 식민지화되었던 나라들이 아직까지도 회복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무장입니다. 힘으로 승리할 것 같으면 열두 영이나 더 되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려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무장입니다.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아주는 복음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입니다. 筍子(순자)에 云 良農(운 양농)은 不爲水旱不耕(불위수한불경)하고 良賈(양고)는 不爲折閱不市(불위절열불시)하며 士君子(사군자)는 不爲貧窮怠乎道(불위빈궁태호도)니라
순자가 말하기를 “훌륭한 농부는 가뭄이 들었다 하여 농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훌륭한 상인은 손해를 본다 하여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사군자(士君子)는 가난하다 하여 도(道)에 게으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복음 전달하는 것을 우리의 성공의 틀, 기준 위에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실패와 성공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명령대로만 하면 됩니다. 명령대로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말합니다(딤후 4:2).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까요? 마태복음 24장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비무장의 복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나라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잘못되면 복음이 전혀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설교합니다. 또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떠난 그 무엇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랬습니다. “규례대로”는 에이오도스는 완료 부사로서 이미 익숙해진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미 지나온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자꾸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신약성경 13세 권을 남겨 제일 많은 분량의 책을 쓴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성경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럽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들어가서 데살로니가에 3주 이상 머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이 회당에 모이는 시간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그 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성경을 떠나서는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유럽지역에 최초로 전해진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조건 믿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3절 “뜻을 풀어” 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강해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을 풀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입니다. 초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메시지의 중심은 병 낳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 시대에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이며 복음 설교자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초대교회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앙 인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해 보라고 런던 신학교에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게서 하나의 커다란 계시와도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지독한 근시라서 강대 상에 설 때에 설교할 내용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쓴 사람입니다.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설교문을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견디지 못해 나동그라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 능력이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예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으신 분입니다. 이 사다리를 우리가 치워버리면 안됩니다. 복음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와 이웃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느 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어보았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새중앙교회 대신교단의 선교훈련에 강의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훈련 받는 분들 중에는 목회를 은퇴하고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 훈련받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제 강의 중에 어떻게 해야 선교편지를 잘 쓸 수 있을까? 또 어떤 편지가 좋은 선교편지 일까 생각했습니다. 서로 논의하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 결여된 상태에서 후방의 교회들에게서 후원만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좋은 편지를 쓸 수 없다는데 공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만 부흥시켜 보려고 전도하려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쓴맛만 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시오. 나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서 한 영혼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놓아주신 십자가의 사다리를 치우는 자가 아니라 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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