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지난 두 주일에도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부족합니다. 또 솔직히 다 설명드릴 수 도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알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때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 십자가가 거침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께서 무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구주께서는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군사력이 있으면서 행차할 때마다 화려함과 어느 왕 못지 않게 큰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왕 중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알 수 없는 어느 집의 말 밥통에서 나셨고, 당시 비천한 직업으로 취급받던 목수로서 일했고, 바리새인으로도 아무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라니, 또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그가 할 최종적인 일이라니, 그야 말로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로마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 나타났던 어느 날, 그 기세 등등한 무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 26:9) 라고 했습니다. 그가 멸시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대 사도로서 바울의 인격과 신앙은 최고조에 달해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부터 십자가를 이렇게 자랑하고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팔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곤 하였습니다(빌 3:5-6).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율법에 능한 사람이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등의 자랑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총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누구나 십자가를 바르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앙이 좋다는 것은 기도하여 목이 많이 쉰 것이나,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가?, 위대한 간증거리가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얼마나 내 중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난 축복은 없습니다.
그토록 십자가를 바울이 자랑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사형에 처하여 더 이상 그것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세상을 제거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문제는 세상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풀면 하늘 나라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결시키는 일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한 타입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 있으며 세상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작들도 당시에 로마가 지어주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께 그 성전의 돌기둥들이 어떠하냐고 자랑했습니다. 또 다른 한 타입의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난번 남북한이 월드컵 예선전이 있었습니다(2009.4.1).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에게 어느 팀을 응원할 것이냐 물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남한 팀을 응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한 민족적 감정이 베어있어 “체육에는 국경이 없는 것 같이…” 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취하는 것은 어느 민족인가? 피부 색깔이 어떤가? 부자인가 아닌가? 어디서 배웠는가? 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세상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피부색이 검으면 어쩐지 우리와 다른 사람 같아서 가까이 가거나 호감을 가지는 것에 두려워하는 어떤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선교를 하면서도 차별 아닌 차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완전히 무너트린 계기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신이 찾은 아이들”(GOD GREW TIRED OF US)이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였습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더 보고 싶은데, 더 책장을 넘기기 싫었습니다. 이해가 안가시죠? 이 책의 내용은 실화입니다. 우리가 수단에 대해서 그동안 알고 있는 상식은 오랜 내전이 있는 나라 정도입니다.
13살의 당카족 소년(존 불 다우)이 자신이 살고 있던 수단의 둑 빠유엘(Duk Payuell) 마을에 젤라바(북쪽 수단에 사는 이슬람인) 들이 한밤중(1987년 수단 내전)에 쳐들어오면서, 그 밤중에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여 1,600km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수 없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이야기입니다. 19년 간이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모든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을 그린 책입니다. 바로 다음 책장에서 이 소년이 당하게될 고난을 생각하게 되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지만 뒤따라온 젤라바들에 의해 물 속에 숨어있어야 했던 일, 그들에게 발각되어 죽도록 얻어 맡은 일 등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 중간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머리 위에 태양은 계속해서 우릴 구워대고 있었다. 소년들은 오줌이라도 마시려고 손에 컵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다니며 오줌을 눠 달라고 애걸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속 걷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우여곡절 속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난민캠프를 찾아옵니다. 구호단체 활동가들은 1만 7,000명의 걸어다니는 해골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1988년 중반 에티오피아 남서부 지역에 설립된 난민 캠프에 26만 5,000명의 난민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년들의 여정은 에티오피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이 이곳을 급습한 것입니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과 물 속에 쳐 넣으려는 에티오피아 군 사이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이들은 물 속에 수장되었고 일부는 악어의 먹이 감이 되었고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 남아 강 건너로 가게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또 사막을 헤매며 어디론가 가야합니다. 현재 이렇게 떠도는 아이들이 선교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을 가리켜 바깥세상 사람들은 잃어버린 아이들(The lost boys) 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멀리가야 하는가?” 라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존 불 다우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우리가 싫어 졌거나, 우리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찾아냈다!”

저는 이 책을 보고 흑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존 불 다우는 흑인이면서 키가 2미터 넘는 장신입니다. 보통 미국 사람들도 존 불 다우 보다 작습니다. 저는 키가 큰 이 흑인을 통해서 민족이나 국가보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친구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미국 난민 정책에 의해서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의 성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자기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던 수단의 당카족 마을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우리의 모든 가치관을 다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주의자, 윤리적인 사람, 시 적인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국가도 민족도 아닙니다. 전도하다보면 어떤 분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민족종교를 믿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민족이나 국가가 십자가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도 한때는 유대인임을, 베냐민 지파임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의 육 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도를 닦고, 내가 무엇을 자꾸만 하려고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구 모퉁이에 있는데 선교사는 자기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제일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기를 의뢰하며 자기 신뢰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기 속에 성공케 하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내어 던지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기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처럼 성장이 더딘 동물도 없습니다. 거북이나 뱀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부모의 도움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가 송아지 낳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소가 새끼소를 낳는데 그만 다 나오지 못하고 먼저 머리만 나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보니까 소가 머리가 둘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눈을 뜨더라구요. 그리고 네 발이 다 나오자마자 땅에 뚝 떨어지면서 물기를 엄마소가 핥아 주니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심리학은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할 만반의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합니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런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중심대로 살아서 성공 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
그러면 우리는 버려진 자 입니까? 그 또한 아닙니다. 수단의 한 소년(존 불 다우)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 자신을 버리면 십자가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에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라고 말합니다.

‘경청’이라는 책에 보면 ‘청(聽)’ 자라는 글자를 풀이한 것이 나옵니다. ‘청’ 자의 부수는 왼쪽에는 ‘귀 이(耳)’ 자와 밑에 ‘임금 왕(王)’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에는 ‘열 십(十)’ 자 밑에 ‘눈 목(目)’ 자를 눕혀 놓은 글씨가 나오고 그 아래는 ‘한 일(一)’ 자와 ‘마음 심(心)’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름대로 풀이한 것은, 듣는 다는 것은 왕 같은 귀를 가지고 들어야 하고, 다시 말하면 집중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 개의 눈이라는 것은 마치 보는 것 같이 열 개의 눈을 가지고 들어야 함을 말합니다. 듣는 다는 것은 눈을 가진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임금님과 같은 귀를 가지고, 열 개의 눈을 가지고 십자가를 똑바로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시 61:2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라고 합니다. 땅 끝이 어디입니까?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곳입니다. 피할 곳도 없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땅 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십자가를 만납니다. 아직도 피할 곳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십자가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학문 때문에, 자기의 재물 때문에, 자기의 배경 때문에 숨을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땅 끝에 선 내가 될 때 십자가를 붙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이 박히신 십자가에 함께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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