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의 알레그로 1장은 종달새가 지저귀듯 상쾌한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됩니다. 이어 계곡에서 물이 흐르듯 피아노가 바이올린과 어울리면서 희망에 찬 봄을 그려냅니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베토벤이 청각장애가 심했던 시기에 만든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정조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예상을 반발하듯 바이올린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경쾌한 울림과 감미롭고 깊은 소리로 청중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피아노가 앞으로 나가면서 바이올린이 뒤따르는 2악장은 느린 템포로 이어지며 청중을 포근함에 빠져들게 합니다. 마치 물소리와 종달새가 노래하듯 선율이 상승했다가 하강하며 역동적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소리 하나 하나를 서두르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베토벤 특유의 열정적 멜로디가 힘차게 울립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위대한 찬양하는 위대한 노래입니다.

한국이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숙적’ 일본과 처절한 ‘야구전쟁’ 끝에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지만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 ‘위대한 도전’ 이었습니다.
전국 야구 고교팀이 55개에 불과한 한국은 고교팀 수가 4천100개가 넘는 일본과 5번이나 붙어 모두 대등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령탑의 중책을 맡았던 김인식 한화 감독은 ‘위대한 도전’ 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을 통 털어 한가지만 말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왔습니다.

본문을 볼 때, 사도 바울이 말할 때 한 문맥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절에 ” 내 손으로…”,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들, 곧 바울이 떠난 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말하며 설교했던 거짓된 유대교 선생들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준다고 가르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길이 단순한 성도들을 매우 혼란한 지경에 빠뜨렸습니다. 13절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해야할 권위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두 가지 권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다른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떠난 모든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얼마든지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것만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만이 우리의 신앙을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양분된다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의 제일 위대한 것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전도자이자 설교자입니다. 그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의(講義)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했습니다. 기독교의 임무는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는 고백 속에는 당시의 복잡한 나라 사이에서 정치문제 속에서 이 재능 있는 대 학자인 바울의 고백은 그의 모든 철학과 심오한 이해력, 헬라의 철학과 시들, 그밖에 다른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미련한 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당을 만든 것도 없습니다. 하나의 학파를 만들어 계승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자원 봉사자도 아니며 박애 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비판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유치하다. 그는 자기 말을 듣는 청중의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하며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사도는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이 모두 의도적인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신도 지혜에 대해서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라고 합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지혜입니다. 그것은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현실적으로 유대나 헬라나 로마인 모두 당시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과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리 현실 정치의 문제가 복잡하고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꺼리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유대인들이 꺼리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생각과 예수 그리스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왕으로 군사로 왕 노릇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한 때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주장하던 자가 힘없이 무능하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상처와 마음속에 분함을 느꼈습니다. 대단히 속은 것입니다. 구세주, 구원자가 죽다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말하고 실천한 것은 그동안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사상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헬라인들도 똑 같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너지고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세상을 다 지배하고 있는데 로마 황제 이외에 주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기존의 생각을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에 앞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자신의 사상이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철학을 좋아할지 몰라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선한 사람, 가장 철학적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 크리스천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 내가 이해하기 까지는 그 어떤 것에도 나를 맡기지 않겠다.”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자신이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아마 100살을 살면서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리는 그의 찬송시에서 “신비요, 죽을 수 없는 자가 죽다니.” 그랬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이해하고 믿는 것은 믿을 수도 없지만 믿음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다 이해하고 따라갑니까?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는 예수님 못 믿습니다.

왜 사람이 타락했습니까? ‘교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 자신이 제일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너 말고는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 제일 모욕적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싫어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쪽에 있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가 암시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여기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들은 모두가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 때처럼 똑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타락했고 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또한 100%센트 아무 흠이 없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완전히 타락한 창녀와 술주정뱅이와 사마리아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셔야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도덕적이냐? 비도덕이냐?,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또는 사람의 규범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마저 다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과 의, 도덕적인 모든 규범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 강하게 비추면 작은 등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1-23)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바로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차별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기존의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 철학을 다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합니다. 지금도 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배웠다는 사람들, 도를 닦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쫓지 아니합니다. 십자가는 다 같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좋게 여기던 것, 사실 그것들이 다 똥 같았다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보니까 더럽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철저하게 우리의 것으로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광의 왕이 죽으신 그 위대한 십자가 앞에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게 있는 가장 크고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모든 교만 헛된 줄 알고 버리게 하소서.

영화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지하철역은 ‘개봉역’ 이랍니다. 제일 싼 것을 좋아하는 아줌마는 ‘일원역’ 입니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은 ‘방학역’이며, 마라톤 선수가 가장 좋아하는 역은 ‘월계역’ 이랍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역 이름이 제일 좋을까요? ‘보라매역’ 입니다.
내가 위대한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나는 거기서 무엇을 봅니까? 이 세상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광경을 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위대한 십자가를 봅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책에 보면 저자이기도 한 포리스터 카터(Forrest Carter)인 주인공 체로키 인디언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늙어 더 이상 돌보기 어렵게 되자 이 아이를 고아원에 맡깁니다. 그런데 고아원에는 가끔 양자를 삼으려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다리가 불편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늘 자기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또 양 부모님들이 오니까 아침에 운동장에 깨끗하게 하고 모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아이도 얼굴을 깨끗이 닦고 머리를 빗고 나갑니다. 그리고 한 줄로 쭉 서 있는데 다리를 절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 날도 이 아이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체로키 인디언 보다 더 못한 죄인인 바울의 고백대로 벌래보다 못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을 반드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다 해결됩니다. 아버지 되시는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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