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 84:6)

종교마다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슬람의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실천규범 중의 하나가 그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메카의 순례입니다. 힌두교는 그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갠지스 강변에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순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티벳의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남, 사천에서 티벳 라싸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1,000년전 티벳불교가 라싸에서 운남, 사천 장족 지역으로 전래되던 길이라고 하여 이 길을 총 7개월 정도 걸려서 약 2,100km에 달하는 길을 절을 하면서 고행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순례의 길을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대하 6:34-35). 그러나 이제 구약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다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만 보고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내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한 성전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순례를 하려면 특정한 장소를 신성시하고 그곳을 정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장소를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우리는 무소부재(無所不在)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섭리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순례는 여전히 기독교의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모두가 순례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향해 여행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그리고 참음으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피로 얼룩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순례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카(눈물) 골짜기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우물을 파는 순례자들의 고생스러운 수고를 주목하며, 이 눈물의 골짜기를 힘들게 통과하는 동안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카(Baca) 골짜기

어느 곳이나 골짜기는 있습니다. 능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것입니다. 바카 골짜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좁은 골짜기입니다. 그곳은 메마르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빗물을 받아 마시려고 그 가는 길에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그 장소를 칠십인역은 “애통의 골짜기”, 라틴 불가타 역은 “눈물의 골짜기”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뜻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자는 그곳을 우물로 만들어 놓는다” 말입니다.

그러나 바카 골짜기는 호화스러운 왕궁이나 집에서만 지내는 것보다 유익합니다. 따뜻한 공기만 계속 쬐면 근육을 풀어주고 뼈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난의 차가운 바람은 우리를 단련하며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지금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이런 때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겨울이 있는 것처럼 불황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좋지 않은 경우로 말하면 세계대전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많이 만들어지고 개발되었습니다. 지금 불황을 타개하려고 전기자동차가 급속하게 연구되고 있고 이것이 상당히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안 들어가 오염을 줄일 수 있고 이슬람 지역의 중동 국가들에게 달러를 계속 가져다 바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를 통해서 더 소중한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실패 없는 성공은 그 가치를 소중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공을 주신 자를 잊게 만듭니다. 그러나 햇빛이 오랫동안 비춰지지 않으면 해를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새는 태어날 때부터 알 껍질이라는 고난에 부딪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그맣고 힘없는 아기 새를 위해 대신 껍질을 깨준다면, 새는 한결 쉽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새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새를 도와줬다기보다 망친 셈입니다. 언젠가 그 새는 분명 고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어서 더 큰 고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고난으로 수 차례 단련된 사람만이 더욱 큰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법입니다.
환난과 고통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까불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알곡은 까불면 까불수록 바싹바싹 까부는 사람에게로 들어가고, 쭉정이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맙니다. 모래 위의 집인지 반석 위의 집인지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장마 물이 쓸고 지나가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야 누구인들 잘 못 믿겠습니까? 환난 풍파가 참 성도에게는 더욱 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시 119:71)하였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짝은 가시밭의 백합화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밭의 백합화는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 때마다, 연약한 꽃송이가 세찬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를 더욱 날리는 것입니다. 즉 환난 중에도 감사와 기쁨의 향기를 잘 드러내는 예수의 신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험해 보이고 힘들게 보이는 바카 골짜기는 사실 안전한 곳입니다. 이러한 곳이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긴장을 하고 기도하며 지나갑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우물을 파야하는 수고를 통해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기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힘이 듭니다.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 잊어버리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없어요. 무엇이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축복입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별들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게 빛납니다. 향품은 빻아질 때 가장 많은 향기를 풍깁니다. 어린 나무들은 흔들릴 때 더 빨리 뿌리를 내립니다. 금은 문지를 때 더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처자식도 없습니다. 방 한 칸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 심장병, 안질, 신경통 등 그의 몸은 완전히 종합병원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측은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태도입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는 불행하다. 나는 비참하다” 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기쁘다. 너희도 기뻐하라.” 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순례객의 목적은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모든 힘을 들여서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일정한 장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만나는 곳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분이 나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찾아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없애는 대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눅 3:16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땅의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이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부어 주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1:3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확인한 제자들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다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3년 전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겠다고 배를 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르르 따라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체념했습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는, 만날 수 없는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의 현장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실 고기 잡는 방법이 틀렸다든가 그물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그들이 배 왼편에다 그물을 쳤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40년 간 미국 남가주대학 심리학 교수로 있던 골드 박사는 제자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첫째, 걸음걸이가 빠르다. 둘째, 언제나 강의실에 오면 앞자리에 앉는다(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셋째, 시선을 집중시킨다. 넷째, 항상 웃음을 띤다. 다섯째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좌절에 빠진 곳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혼자 했으면 이제는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은 순종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에 하나님 없이 가면 순례하나마나 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순례의 의미가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다시 가 볼까요. 고기 못 잡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순종했습니다. 그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함께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함께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바카 골짜기라고 해도 우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한 찰스 디킨스라는 영국 소설가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많은 빚을 지고 감옥에 가게되자 그는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과 상표를 붙이는 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그 때에 “No advice, no counsel, no encouragement, no consolation, no support from anyone that I can call to mind, so help me God!(충고도,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하소서!)” 라고 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순례의 길을 갈 때 바카 골짜기가 기쁨의 골짜기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바카 골짜기가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생명의 골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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