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피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11)

우리 인사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올 설 명절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30명이고 설 당일 날 교통사고 부상자는 5,176명이나 됩니다. 대물사고 발생은 4,692건입니다. 이것은 연 평균보다 8-9% 감소한 것이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대대 약 500명, 연대 2천~3천명(대령:***)이고, 사단 1만~2만 명(소장:☆☆)이면 10개 대대 또는 2개 이상의 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된 것이고, 1개 사단의 절반이 중상 병이 생기고 자동차는 쓸모 없이 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고인이 된 30명은 아마 자기 자신이 죽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불행은 나에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에 고인이 된 30명 중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군포가 유명해 지고 있습니다. 군포 여대생 납치하여 살인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매스컴이나 다른 사람들은 ‘군포’ 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작 여기에 사는 우리들은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세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 다윗은 전 국력을 사용해가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전쟁의 역사 속에 늘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들이 죽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작습니다. 면적이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다윗 시대 때의 면적은 유대 주변이기 때문에 더 적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적들과 사울만이 다윗을,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미 믿는 우리에게도 사단은 손을 내밉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까지 사단은 쫓아 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 어느 곳에 피해 숨어 있어도 사탄 마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은 21세기가 성령 시대가 아니고 21세기는 무신론의 재도전 시대이고, 적 그리스도의 시대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안전지대(safety zone)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가도 안전한 땅(Safety Island)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가장 안전한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다윗은 이 안전지대를 종종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시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다윗은 어려서 형들과 목장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적장이 이스라엘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없이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피난처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다윗의 도피성이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져 영원한 안전 지대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미국의 서부의 평원지대 중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초원 지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때때로 그곳에 사냥을 하러 가기도 하며 또 그밖에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건조기에는 그 대초원 지대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데 그때는 불길이 60미터 내지 90미터나 높게 타오르게 되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벌판을 달리는 말보다도 더 빨리 번져 나간다고 합니다. 이때,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도피하지 안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속히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 지대를 어떻게 만드냐 하면 맞불을 놓아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초원 지대를 태워 버리면 더 이상 불길에 휩쓸릴 염려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죄를 소멸시켜서 안전 지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며 안전 지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오시는 것만으로 사단은 우리를 헤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마귀는 벌벌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안전 지대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명저 중에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큰 도시가 나옵니다. 하나는 성공과 부와 영화로 가득 찬 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다른 도시는 세속화된 도시처럼 화려하거나 영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 위에 서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속 도시를 로마로 보았고 하나님의 도시는 기독교로 보았습니다. 로마는 망했고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삽니다.

고백하세요.
본문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피한 사람, 하나님만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요청하세요. 제가 일산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여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아파트를 구입할 때 구 아파트 이름이 “청구”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하셔서 아파트 입주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몸 속에는 부적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대들보에 부적 붙여놓은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런데요 몸에 지닌 것 보다, 집 대들보에 붙여 놓은 것 보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하고 주를 믿지 못하고 다른 것에 기대어 보려는 마음의 부적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요, 이것저것 많이 구합니다. 예수께서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무엇이든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합시다. 다윗의 시(기도)를 보면은이요 사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본문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라는 단어만큼 좋은 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말은 성도입니다. 목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도 집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되고 장로 집사는 되었지만 성도가 안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를 우습게 압니다. 여러분! 목사, 장로, 집사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구원받습니다. 총신대학교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1948년 6월 9일 신설장로회신학교 특별 기도회 때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의 본문으로 “선지 학교의 중건”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나온 것이다)입니다.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거룩한 성자(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되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목사, 장로, 집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성도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한 성도들을 존귀한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장수였습니다. 마치 군대 문화와 같은 곳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가 존귀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는 다윗에게 늘 기쁨이었습니다.

훈계와 교훈을 받아들이세요.
본문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랬습니다. 잠언 15: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생명의 길로 가게됩니다(잠 4:13, 10:1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훈계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밤마다 다윗은 양심이 교훈을 했을까요? 예 밤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시 121:3-4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기가 밤에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졸립니다. 육신의 피곤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앞서 모시세요.
본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마치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먼저 드리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뒤에 모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자기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다른 모임이 먼저입니다. 다른 것에 돈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생각에 마음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먼저입니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지금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항상’ 이라는 말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세요?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앞에 두셨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시 17:15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가 일어날 때에 주를 닮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버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빌 2:8) 정작 자신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로마 군인도, 무지하여 침을 뱉으며 따라오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성도가 됩니다. 회개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레 5:8) 라고 했습니다. 급한 것은 나의 속죄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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