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순위 정하기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5-39)

시골에 살던 청년이 대구에 와서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쓰는 돈보다 저축하는 돈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드디어 작은 빌라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출을 얻었기에 갚아야 할 일이 태산이지만 너무 기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드디어 방 두 개 있는 작은 빌라를 구입하였어요. 어머님과 함께 한 번 다녀가시죠? 위치는 대구 봉덕동 파출소 근처에 맨션 빌라 301동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내일 점심때쯤에 도착하마!”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났건만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궁금하던 차에 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버님, 왜 아직 못 오시고 계세요?”
“아! 여기가 봉덕동은 맞긴 맞는데 빈손 빌라는 없다 한다 아닌가?” “아버지, 빈손이 아니라 맨션이에요, 맨션…!” 그 때 아버지 왈, “이놈의 자식아, 빈손이나 맨손이나 같은 말 아닌가?”
일설에 아파트나 빌라 이름을 어렵게 작명한 이유는 어르신들이 쉽게 그리고 자주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그 대상이라 하는데, 그저 우스갯소리일 것입니다.
어쨌든 맨션과 빈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맨션으로 찾으면 아들집에 오실 수 있고, 빈손으로 찾으면 망신만 당하다가 결국 사랑하는 아들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단어 하나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사랑해!” 그러자 그 남편도 고마움에 문자를 보냈는데 그 날 밤 그 집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보, 사망해!”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에 아름다운 동행이냐 아니면 지겨운 동행이냐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희생은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를 위한 언행의 희생과 봉사를 감히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말입니다.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

초대교회 사도인 성 크리스톰은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파선 당한 자에게 항구이며,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에게 생명의 새끼줄이며, 넘어지는 자에게 지팡이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 값진 보석이며, 병든 자에게 의사이고, 성도들에게 축복이며 환란의 구름을 헤치는 자에게는 그 불행을 정복하는 일이며, 인간 행복의 기초이며 계속된 기쁨의 원천이고 철학의 어머니이다.” 이 정의대로 보자면 이 세상에 기도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을 활용하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새벽에 외진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 장소는 이제 제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prwiprwi:프로이)이라는 단어는 “pro:프로” 라는 기본전치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프로는 “앞에, 전에, 정면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늘 하루를 함께 다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조용히 기도하실 수 있는 시간으로 새벽 시간을 활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흥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발견하자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전날 밤에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놀려들었는데 병자를 고쳐할 예수님이 안 계시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난처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찾아나서야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제 병자를 고치시려는 예수님의 열정이 사라지셨단 말인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 많은 병자들은 어떻게 하고 떠나시려는 것일까?
이미 이곳 가버나움에서 얻으신 명성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드시려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은 매사에 우선 순위를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임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천국복음입니다. 그리고 병 고치는 일은 부수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0:38-42]
예수님은 어느 날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대접할 식사준비로 아주 바빴습니다. 그러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에게 명하여 자기를 돕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우선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일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염려하다”라는 헬라어는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마르다는 최소한의 예수님께 대접할 음식만 만들면 되는 것인데 잡다한 부엌일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는 척함으로 알뜰 살림꾼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는 예수님보다도 자기 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언제 또 이 집에 오시게 될지 모릅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듣는 것이 집안을 말끔히 치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일 찾아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했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일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되는 예수님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제일 화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심방 갔는데 집안은 깨끗하게 하고 삽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왜 교회 못 나오셨어요?” 라고 물으면 “내 집안 청소하느라고 못 갔어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집안 청소하는 것 보다 교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게 문 열고 밭에 가는 것 보다 교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산에 가는 것이 더 먼저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격이 급해서 자동차 운전할 때 빨리 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앞차가 가면 빵빵거리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들 쫓아가 보면 별달리 급한 일도 없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정작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선 할 일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도 정해야 합니다.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 순서를 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거기서 기도하시더니”(kajkei’:카케이) 는 “그곳에서도 역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정해진 곳에서도 하셨지만 동시에 늘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어지시면 기도하러 가신 줄 알았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저는 컴퓨터를 일찍 시작한 사람입니다. 86년도에 안양에서 IBM 16비트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저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컴퓨터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컴퓨터는 나홀로 컴퓨터는 없습니다, 모두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보 홍수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포탈 사이트에 가도 정말 선정적인 홍보물들만 넘쳐납니다. 사용자들의 글들을 보면 가관도 아닙니다. 어디 하나 절제된 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옛 말에 “내뱉는 다고 다 말이 아니다” 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다보니까 인터넷에도 눈에 보기 좋은 사진을 많지만 마음이 닫는 사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진 찍는 크리스천 분이 마음을 담은 사진 한 장 찍어보았으면 그럽니다.
제가 왜 컴퓨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몸으로 무엇을 하던 시대는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했습니다. 편지 써 보셨지요. 얼마나 여러 번 섰습니까? 또 찢어 버리고, 또 찢어 버리고… 그러면서 옥석을 가리듯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지요. 컴퓨터 앞에 앉을 때 반드시 기도해야 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무수한 시간을 잡아먹을 뿐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하다가 시간을 다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서기관, 율법사)은 자기 나름대로 율법에 우선 순위를 정해 놓았었습니다. 만약에 급박한 상황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을 먼저 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어떤 것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 하는 일로 중요성을 따졌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동시에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율법도 더 먼저 지켜야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정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시체는 오래 두지 말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장래가 나면 얼른 방을 붙이고 친인척이 다 도착을 안 해도 직계 가족만 있으면 얼른 시체를 장사지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미쉬나에보면 부모님 장래가 나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도 부모님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달려 가야합니다. 즉 제일 우선이 부모님이 장래 치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8:21-22절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님의 장사를 굳이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것이 더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3-4절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일이 모든 우선 순위에서 반드시 제일 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웨슬리의 제자가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다가 소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가면 교회 예배시간이 늦거나 이미 예배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가야합니까? 아니면 그냥 교회에 가야합니까?
웨슬리의 대답이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오세요?, 그러나 그 소가 매주일 물에 빠진다면 그냥 버려 두고 오세요.” 그랬습니다.

우리 KCM MIR훈련을 받은 자매가 있습니다. 미국에 갔다는 소식도 있었고 저희하고 간혹 연락을 했었습니다. 시집도 안간 자매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인가 하나님께 먼저 갔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의 임종을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찬양하고 말씀보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바로 몇 주일 전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시면서 계속 병자를 돌보시는 일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동네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해오던 습관대로 그리고 배운 대로, 평소에 생각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전도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고 보이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생각해 놓았던 것이 마지막 순간에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나의 뜻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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