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6:20-23)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처음 전반부는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당하게 될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반이후에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중간에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다음에 37장이 나오는데 그 유명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의 환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뼈만 앙상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르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시고 그들을 열국 중에서 모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 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신 4:37)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완전한 길이고 축복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이 진리를 알고 경험했기에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1-2)
우리도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과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길로 갈 때에는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때때로 오는 환란의 자리에는 이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 하신다면서 왜 이런 환란과 어려움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북해도로 많은 어선들이 청어를 잡으러 갑니다. 그래서 청어를 잡아 가지고 수조에 넣고 돌아오다 보면 한 3-4일이 걸리는데 그 동안에 수조의 청어들이 모두 죽어 버립니다. 옛날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는 놀랍게도 청어를 살려 가지고 돌아와서 남들의 두 세배의 값을 받고 청어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부들이 그 비법을 묻자 처음에는 가르쳐 주지 않더니 나중에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청어를 넣은 수조에 바다메기를 한 두 마리 넣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어부들이 일제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지 메기는 청어 잡아먹고 사는 고기인데 메기를 넣어 청어가 다 잡아 먹히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부는 메기의 배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끝없이 잡아먹는 것이 아니고 배가 부르면 못 먹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마리밖에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3일 동안 10마리의 청어를 잃어버리고 다른 모든 청어가 살면 이익이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어 수조에 메기를 넣고 바라보았습니다. 청어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안 잡아 먹히려고 청어들이 메기가 움직이면 정신 없이 쫓겨다니는 것입니다. 메기가 배가 불러서 청어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고 그냥 움직여도 청어들은 두려워서 정신 없이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망 다니느라고 너무 바뻐서 죽을 새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온 수조에 고기들이 퍼드득 거리고 움직이니 자동으로 물 속에 산소들이 공급되어서 건강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영국 항구에 올 때까지 청어들이 살아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메기 같은 사람, 메기 같은 사건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깨어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답게 살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말하고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당장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을 말을 한다고 욕합니다. 본문에서 더럽힌 이란 말이 각 절에 모두 나옵니다. 23절에는 두 번 나옵니다. 이 단어는 “ll’j;:하랄” 더럽히다의 어근이 입니다. 이 뜻은 “상처를 입히다, 모독하다”입니다. 심지어는 “살해하다” 라고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모독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일 수는 없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뜻입니다.
본문 20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이 얼마나 당혹스런 일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열국중에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였는데 이 백성 때문에 이름이 더렵혀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21절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고 하십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을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은 더러운 짓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제일 앞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해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그 기도가 헛될 뿐 아니라 가증스럽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더럽히다” 라는 말과 똑같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내 거룩한 이름”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다’의 “yvid]q;:코데쉬” 는 신성함을 뜻하는 말로 “봉헌된 것, 성소, 성도” 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vd’q:카다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성결하다. 선포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병이 고쳐졌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이 병이 나았으면 제사장은 “카다쉬” 라고 선포해야됩니다. 이제 깨끗하다라는 것입니다. “카다쉬” 성결하게 되지 않으면 “코데쉬”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탕자 같은 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유명한 시인 롱펠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은 메모쪽지가 6천불(7백 만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미국의 대 실업가인 록펠러가 사인하면 그 메모지는 은행에서 백만 불까지 지불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카소라는 화가는 종이 쪽지에 한 10분간 데생한 것이 집 한 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합니다.
우리는 휴지 조각 같고 넝마 같은 죄 속의 인간이지만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는 죄 사함을 얻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3절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장 큰 이름입니다. 가장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뜻합니까? 당연히 제일 크고 제일 거룩한 이름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는 완전히 십자가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제일 중요한 가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4.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에 의해서는 소망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그렇게 먹칠을 해 놓고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아니면 이 땅에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저들의 삶의 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큰 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은 대단히 이상적인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선민인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처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율법을 폐기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아들을 보내셔서 그것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높은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듯이 저들은 그 율법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책망을 받고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고, 마침내는 그들이 세운 나라조차 망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지만, 결코 저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그의 구원 안에 끌어 안으셨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간디가 어렸을 때,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침실을 뒤져서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양고기가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했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한 참 고민하던 간디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 보다 벌을 받을 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이라 아버지는 이미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종이에 자신의 잘못을 몇 줄 적고 그것을 말아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구멍에 끼워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는 편지를 본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열쇠구멍에 꽂아 놓았던 종이는 없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보니 아버지가 편지를 읽으시며 눈물을 닦고 계셨습니다. 어린 간디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간디의 잘못을 용서하고 뜨겁게 포옹을 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가 제시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명령을 철회하시지 않은 것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삶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기간은 미완성된 단계로 완성을 향해 자라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구원을 취소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로 계속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여 주안에 거하는 삶을 포기하고 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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