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 신앙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잠언 24:16-22)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에 간(2008.4.8) 이소연씨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미국 NASA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물론 국제우주정거장 관련 일일소식을 다루는 NASA의 ISS 데일리 리포트에서는 이소연씨를 ‘우주비행 참가자(SFP-spaceflight participant)’로 명기돼 있습니다. “South Korean ‘Spaceflight Participant’ So-yeon Yi,will launch April 8 on a Soyuz spacecraft from Kazakhstan”. 공식적으로는 우주 관광 패키지에 300억 내고 탑승한 대한민국 손님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주인’이라는 용어를, 러시아와 미국에서는 자신이 로켓을 조정하고 직접 가지고 간 우주비행 조종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해 놓은 것의 단순한 탑승자가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해야합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과학자를 뽑으라면 에디슨, 아인슈타인, 뉴튼, 갈릴레이, 퀴리 부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사람이 한국에 이민을 와서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 모두 백수건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취직을 못했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이력서 심사에서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졸업밖에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면접만 보면 떨어집니다. 발명품도 많지만 특허 심사할 때 학력 때문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은 잘 하는데 수능시험점수가 안나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안됩니다. 그래서 대학을 못 가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뉴튼은 아주 조직적인 두뇌를 가진 과학자인데 이 사람이 쓴 논문을 써 줄 대학교수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아주 말을 날카롭게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도 바른 말을 잘 하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퀴리 부인도 대단한 두뇌를 가진 여성과학자인데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해도 얼굴이 받쳐주지 못해서 안 된답니다. 성형수술을 해도 원판이 안되니까 다듬어봐도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이 모두 한국 땅에서는 백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유머는 현재 대한민국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칠전팔기란 말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칠전팔기란 한자 고사성어가 성경의 잠언에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격언으로 들으면 단순한 말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좋은 말입니다. 여기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지라도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 넘어지는 것은 완전한 멸망을 말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전히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잠언 3장에서 “모든 만물이 때가 있고 기한이 있는데 넘어질 때가 있고 일어날 때가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의인이냐, 악인이냐가 아니라 다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동기와 과정과 본질을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방법을 정당화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넘어지든 일어나든 넘어졌으니까 문제가 되고 일어났으니까 문제가 안 된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왜 일어나는가를 따지십니다. 다시 일어날 때에는 예전처럼 살지 않고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좀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덕이 안 되는 사람이 일어났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일어나도 별것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든 일어나든 덕이 있어야 됩니다. 도덕성이 따라야 됩니다. 넘어져도 덕이 없고 일어나도 덕이 없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졌다는 것을 문제시하거나, 일어났다는 것을 문제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넘어지든 일어나든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덕입니다. 근본적으로 덕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교회론을 이야기하면서 결론이 “모든 일을 행하되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의 덕을 무시해 버리면 안됩니다. 부덕했던 그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예전에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 그 때 소아과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시고 있었던 의사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랬더니 돈만 벌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많이 처방하면 좋지 않은 약을 마구 처방하면서 돈만 아는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회개했겠지 그랬습니다.
여러분, 죄수들을 교도소에 가둔다고 다 좋은 사람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회개하고 자신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자세

본문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은 원수가 넘어지면 얼마나 통쾌합니까? 네게 감정이 안 좋은 사람이 넘어지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굉장히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는 기쁨은 내 마음을 점점 굳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원수가 넘어지거든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하나님의 기쁨과 선택의 기준이 많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적은 민족이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이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뻐할 것은 원수의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 19절을 보면 정 반대입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야 믿든 말든 성공한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요? 솔직하게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부러워 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식투자해서 돈 번 사람, 우리 집 값은 그대로 있는데, 나는 집도 없는데 다른 사람 집은 왜 그렇게 올라가는지요. 그렇다고 이 분들이 다 악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악인인데 잘 나가는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남이 잘 되는 게 얼마나 부럽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안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게되다 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때가 되고 기회가 되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실패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그의 선수생활 가운데 홈런을 714개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트라익 아웃을 1,330회나 당했습니다. 714개의 홈런을 때리기 위해서 1,330번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만 당한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면 선수가 비참해집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고 걸어 들어가는 선수는 얼마나 처량한지 모릅니다. 그 처량한 수치스러운 모습을 1,330번 겪으면서 714개의 홈런을 쳐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긴장하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의인도 일곱 번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십자가를 졌다고 절망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우리 앞에 있으면 십자가의 절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주변에 넘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안수 받은 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예전에 비해 선교지 방문하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지 방문하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치가 보입니다. 음식점에 가도 좀더 젊었을 때는 얻어먹어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내야합니다. 예전에는 말에 실수가 있어도 젊다는 것으로 그냥 넘어가는 수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나 선교에 관해서 더군다나 성경에 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실수라는 말이 잘 용납이 안 되는 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너무나 어려워서 전도사 그만하고 세상에 나가 돈이나 벌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 친구들도 돈벌어서 신학공부하고 교회 하겠다고 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 그들의 말대로 돌아온 친구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다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이것이 싫어서 저쪽으로만 가면 될 것 같지만 이런 도피성은 역시 그곳에 가서도 얼마 못 견뎌냅니다. 여러분 삼진 아웃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면 승부를 하세요. 자꾸만 뒷걸음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철부지 제자들을 주님은 참아주셨습니다.

성공과 실패에는 분명한 분기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갈라집니다. 특히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은 성공하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가능성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꿈은 마음으로 강력하게 원해야만 현실이 됩니다. 즉,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기대하며 끈기 있게 실천해나갈 때 가능성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는 유행이나 상황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부속품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엔진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맛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일 비참한 가운데 빠졌던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서 한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입니다. 그가 바벨론의 그발 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원문을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아 일어나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입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비록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지만 자포자기하고 살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2절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를…” 라고 합니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는 7번 넘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면서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칠전팔기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으로 칠전팔기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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