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속죄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레 5:8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 그 속죄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몇 일전 서은이하고 동화책을 보았습니다. 동화책에 푸른 언덕 위에 교회처럼 생긴 아름다운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서은이가 “교회 아니야!” 그러는 겁니다. “왜?” 그랬더니 “십자가가 없잖아!” 하는 것입니다. 서은이의 말은 정답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요즘 십자가 없는데 교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5살 어린이 서은이보다 모른단 말입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하고 직접 만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뽑으라면 당연히 모세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하고 가까이에서 많은 만남과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습니다.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그리고 모세는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지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있었으니까 석공처럼 십계명을 파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치 도마 같은 의심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새기신 것은 누가 보아도 사람이 쪼아서 새긴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증거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이전에 제일먼저 만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을 둘 증거궤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출 25:10-16). 그리고 이 증거궤를 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곳을 속죄소라고 합니다(출 25:17-22). 성전의 핵심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냐 하면 속죄소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장막 가운데 거하시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곳을 만드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여기까지가 출애굽기입니다. 성경 다음 권은 레위기 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다룬 책입니다. 성전을 만드셨으니 이제 어떻게 하라고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먼저 드려져야 합니다.

레위기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전의 목적이 속죄소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제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합니다. 제사 역시 속죄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레 5:8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지만 사람이 자기 죄를 속하려고 제사장에게 와서 속죄제를 부탁하면 다른 모든 제사를 미루고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제일 먼저 드려져야할 제사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혹시 제 설교를 너무 잘 들으셔서 기억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제사에 관해 대략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사의 종류와 순서를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처음 제사가 무엇이라고요? 속건제 -> 속죄제 -> 화목제 -> 소제 -> 번제입니다. 그런데 속건제와 속죄제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레 5: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속건제를 드리되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로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 자신의 일로 이 또한 속죄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로 죄 사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곧 내게는 속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속죄의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로 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식으로 보면 속건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간증입니다.] 서대문에서 목회 할 때 대게 성도들이 극빈자이고 교회 재정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학생 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서 우리 교회에서 밤에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돌보면 등록금을 우리가 대어 주고 그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필하고 난 다음에 월요일 날 오니까 이 사람이 달아나고 없는데 보니까 교회 그 날 주일날 헌금 거두어서 넣어 놓은 금고를 깨어 가지고서 돈을 다 훔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저는 아주 그냥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매주일마다 받는 헌금을 가지고 겨우겨우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그만 돈이 송두리째 없어졌으니 그 충격은 말로다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한 결과에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교회는 그대로 그 충격을 이겨냈는데 한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어느 곳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아주 이발도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고 행색이 굉장히 초라한 한 젊은이가 내게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저를 알지요.” “알고 말고.. 너 고학생으로써 우리 교회에서 도와줬는데 금고를 깨고 돈 훔쳐간 놈 아니냐?” 그러니까 그 놈이 하는 말이 “그것다 옛날 일입니다. 나는 그때 이후로 기도원에 가서 죽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다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죄제와 속건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은 속죄제물만 드리면 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죄 한 것은 속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속건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머리 좋으신 분이 그럼 하나님께 잘못한 것 용서받는 것이 더 쉽네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가벼운 용서가 아니라 지독한 희생을 치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 갚기도 힘든데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어떻게 갚습니까? 사실 갚을 길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먹어야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가장, 제일)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레 6:25) 번제는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로 이 번제를 드리는 장소에서 속죄제의 희생제물도 함께 바칩니다. 우리의 속죄는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번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드린 속죄제물 중 불살라 바친 내장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속죄제의 고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기를 만진 사람도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6:27).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지내면서 만찬을 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예수의 몸은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속죄제물은 거룩한 것이고 이것을 만지는 모든 자가 다 거룩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속건을 위한 속죄제는 누구나 드려야합니다.

속죄는 지극히 개인적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아무도 이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담이 되어 가난한 자는 제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 만큼은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드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첫째, “…양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레 5:6)
둘째, “만일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레 5:7)
셋째,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레 5:11)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속죄제를 못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에바 십분 일은 약 2.2리터입니다. 한끼 먹을 수 있는 양식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속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규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규정이지 충분히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비둘기나 고운 가루를 드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눅 21:2-4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지 속죄하기 위한 제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주셨습니다.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도 필요 없습니다. 본문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 제물을 바칠 때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고 했습니다.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이 양이, 염소가 또는 비둘기가 아니면 고운 가루가 내 대신 드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대신 죽는 동물에게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제가 5-6살 때 아버님이 장터에서 옷 장사를 하셨는데 내가 장에 나가면 옷에서 뒹굴고 장사를 방해하니까 어머님에게 연락해서 항상 나를 데리고 가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날을 알고 내가 나가는지 모른다고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어떻게 장날을 알았느냐? 그 비밀을 공개합니다. 시골 장날이 되면 소장이 먼저 열립니다. 우리 집 고개 너머의 마을에서 소가 줄을 이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날이 바로 장날입니다. 그런데 소 눈을 보면 눈물이 한 방울 맺혀있습니다. 그리고 ‘엄마~’ 하며 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을 소가 아는 모양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아픔이 있습니다. 쓰라림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였던 보먼 박사가 인도 켈거타의 나환자 수용소 안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준공식이 있던 날 82세의 한 인도 노인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박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나이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서 죽어준 신은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 모든 죄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것은 속죄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우리의 죄를 속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죄가 속해지느냐 아니냐는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 하신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롬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속죄제가 마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죄가 속해 졌으니 정죄함이 없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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