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8.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본문 : 마 2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출생지 : 베들레헴, 성장한 곳 : 나사렛, 나이 : 33세, 혈통 : 유다 지파이며 아버지는 요셉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함, 학력 : 없음, 직업 :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나 목수 일은 하지 않고 제자들을 모아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음 결론은 무직, 주요활동사항 :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가 감당치 못할 분임을 소개함, 산과 들,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음, 많은 불치병을 고쳤음, 오병이, 칠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킴,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바다를 걸으신 적이 있고, 하늘에서 광채와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고 함.
대략 이런 내용으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대중을 선동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등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좀더 면밀히 관찰하고 그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여 그의 진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율법에 관한 한 당시 능가할 사람이 없는 서기관과 율법사를 예수께 은밀하게 접근시킵니다. 이런 활동을 3년이 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과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했습니다. 중요한 답변과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약 40번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의 결론은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책을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귀찮아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속하여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기보다는 계속하여 오병이어와 같이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죄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3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실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결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이 때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대열에 포함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오시는 중에 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마20:29-34). 이곳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입니다.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루동안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예수님은 해발 900m의 군사 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에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감람산은 해발 약 800m에(수리산 489m) 위치한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정도, 시온 억덕 보다는 약 30m 정도가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남쪽으로는 유다 광야와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서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시며 성전을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 14:4) 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곳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준비하십니다. 먼저 제자 두 사람을 시켜서 마을로 내려가면 그곳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두 제자들 중의 하나가 나귀 임자였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고 짰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아는 이를테면 병을 고쳐주어서 거절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네 가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시고 예언자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서 예루살렘까지는 3km가 채 안됩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시고 가시는 것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하신 말씀을 본문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셋째는 지금까지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세상에 공개하심으로 3차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마 16:13-20)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속의 역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이 원활한 사역을 위해서 당신이 메시야 구세주임을 함구하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마 16:20, 17:1-9). 그러나 이제 당신이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모퉁이의 머릿돌’(42-44)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넷째는 본문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은 튼튼한 군마를 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어서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 동네 언른 들도 잘 안타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아이들이나 타고 놀기에 딱 좋은 동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의 건장한 33세의 남자가 타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수함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군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정을 하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이제 더 물러설 곳도 물러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음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십니다(12-17). 성전 정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로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공박하셨습니다(18-22).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역공을 하신 후(23-27) 두 개의 비유(28-32, 33-46)로써 책망을 가하셨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이제 예수를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본 장 이후에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노골적이고도 급속도로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천군만마대신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온 성이 소동하여’ 너무 점잖은 번역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성이 뒤집어 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외친 한마디는 ‘호산나’ 이었습니다.
‘호산나 : 구원하소서. 구원해 주세요.’ 라는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뜨거운 피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토록 구원자를 부르짖고 환호하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의 소리는, 그 어떤 군악대의 요란한 나팔소리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서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되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서 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추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하신 평강의 왕이셨던 것입니다(사 9:6).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미 예수님을 만났거나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야하는 명절입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누군가 “이는 누구뇨?” 하였고 모여든 무리 스스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요 7:41, 52).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조롱하려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요 19:19)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습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몸빼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셨을 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나니 그 어머니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런 어머니였습니다. 나사렛은 이제 자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 돌을 다듬는 석공들이 하루는 돌을 다듬는데 모든 고른 크기의 돌들 중에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돌을 본 공사장 감독은 “이건 잘못된 쓸모 없는 돌이군. 왜 이런 돌을 보냈지? 이 쓸모 없는 돌을 언덕 아래로 굴려 버려라.”하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독의 명령에 따라 이 돌은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버려졌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서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감독은 사람을 보내 석공에게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주춧돌이 필요하니 보내주게” 하였습니다. 석공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벌써 오래 전에 주춧돌을 보냈다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7년 전에 기드론 골짜기로 필요 없다고 굴려 버린 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돌보십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제 그분이 부끄러운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