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7. 선한 목자와 양) / 본문 : 요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한 양치기가 매일 아침 연한 풀을 들고 양의 우리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마을의 한 사람이 양치기를 따라갔습니다. 양치기는 다리가 부러진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양의 다리가 부러졌습니까?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것입니까?” 양치기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부러뜨렸습니다.” 마을 사람이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소. 그런데 양의 다리를 부러뜨리다니요…”
양치기는 양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 양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슬슬 도망을 가지요. 그런데 목장 주변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요.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린 것입니다. 매일 음식을 먹이면서 정을 쌓기 위해서지요. 제 목자를 알아볼 때까지 꼴을 먹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양이 길을 잃으면 주인은 개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개는 양을 잡아먹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양을 몰고 오게 하기 위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못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복을 얻게 하심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kalov”:칼로스)”이란 말은 “아름다운, 정직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막 10:17-18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질문자가 구원에 대한 질문과 같이 선한 주체를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선한이는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는 선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정직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반대로 거짓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거짓말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들어갔을 때 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9계명으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입니다.
시 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수박밭을 가꾸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문제없이 농사를 지었지만 한 가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누가 수박을 따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생각 끝에 꾀를 내어 수박밭에 팻말을 세웠습니다. “이 중 한 개의 수박에는 청산가리를 주사했음” 다음날 농부가 수박을 세어보니 그대로였습니다. 농부는 기쁜 마음에 돌아가려다가 팻말 밑에 적혀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두개가 됐음”

거짓의 대장은 사단입니다.
합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복음을 대항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가 좋습니까? 악한 목자가 좋습니까? 질문을 하는 제가 바보이겠지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악한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모르는지 모릅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1968년 11월 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조선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습니다. 공산당은 이승복에게 “북조선이 좋으냐?, 남조선이 좋으냐?”는 질문에 이승복 어린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죽었습니다. 악한 것에게 당해보지 않은 분은 악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삯군 목자는 나쁜 목자는 아닙니다. 직업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임무에 충실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목자입니다. 보수를 받고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일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선한 목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 목자의 책임의 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을 보호하지 않더라도 책임을 추궁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삯군의 한계는 자신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양이 중요합니까? 자신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다 양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하잘 것 없습니다. 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삯군 목자는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양의 실태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의 상태에 대해서 완전히 꿰뚫어 보듯이 압니다.
14, 15절에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같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정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직업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4 하반) 그리고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합니다.
본문 14, 15절에는 각각 안다는 단어가 두 번씩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알아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눈치 없는 남편들이 뭘 자꾸 아내에게 사서 바칩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마음을 풀지 않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알아주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양은 참 무지합니다. 어느 정도 무지한가? 어리석을 정도로 무지합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길을 찾아옵니다. 연어도 고향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못 찾아옵니다. 양은 자기 앞에 가는 양을 따라갑니다. 요령을 피울 줄 모릅니다. 앞의 양이 낭떨어지에 떨어지면 함께 떨어집니다. 그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리고 양은 재주가 없습니다.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다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넘지만 양이 재주넘는 일은 역사 이래로 없습니다. 여러분, 재주 부리는 양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간의 요령과 재주를 거둬내야 합니다. 그래야 양이 됩니다. 양은 재주를 부릴 지혜가 없습니다. 뒤집어져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더러운 동물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양 구경을 하면서 제일 실망을 했습니다. 저는 양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림 속의 양은 얼마나 깨끗하고 뽀얗고 탐스럽습니까? 옆에서 보니 그렇게 더러운 짐승이 없습니다. 씻을 줄 모릅니다. 악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더럽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런 더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항상 깨끗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없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양은 공격형 무기가 없습니다. 뿔 가지고 받을 줄도 모르고, 발톱가지고 할퀼 줄도 모르고, 이빨 가지고 물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은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는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도, 어떤 사람의 낯선 소리도 다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 음성의 휘파람 소리,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야고 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야고씨는 북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양치기의 복장을 하고 나서면 쉽사리 아라비아 양치기로 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브엘세바 지역을 방문하고 있던 야고 선교사는 길옆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목동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양들은 돌 투성이인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 양떼를 부르죠?” 그러자 한 양치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양떼들에게 보내는 신호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교사도 그 양치기의 소리를 아주 정확하게 흉내냈습니다. 그렇게 한 두 번 연습한 후 야고 선교사는 양치기의 외투와 지팡이를 빌려 가지고,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양들에게 신호를 되풀이해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짜 양치기의 신호에는 머리를 쳐들고 반응하는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양치기가 외투나 지팡이를 전혀 갖지 않고서, 선교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신호를 양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진짜 양치기의 신호를 들은 양들이 그 즉시 풀 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쳐들고 재빨리 자기 주인에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 양치기들의 말에 의하면, 자기 주인의 신호를 듣지 못하고, 가짜 양치기의 신호를 쫓아가는 것은 병든 양뿐이라고 합니다(레이몬드 에드몬).

그리고 양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양입니다. 우리 성도가 왜 귀한지 아십니까? 우리 숨을 거두는 우리 생애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끝낼 때 내 인생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끝내기 때문입니다. 양은 제물 중에 가장 제물답습니다. 양의 가치는 제물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양은 제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치가 없습니다. 본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를 기억하십시오.
양은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럽고 싸울 줄도 모르는, 조그만 쥐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존재이지만 목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란 목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따라가는 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은 겁이 많고 성격이 급한 동물입니다. 어떤 때 목자가 양을 나무에다 묶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왔다 갔다 하다보면 묶어놓은 끈이 꼬이게 됩니다. 이 때 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끈이 꼬여 있을 때는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양의 못된 성격 때문에 그 끈을 자기가 풀어보겠다고 하다가 끈이 더 꼬여 나중에는 목에 메여 죽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어려서 목동이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목자가 얼마나 양을 위하여 신경을 쓰고 수고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양에게 참된 목자만 있다면 그분께서 알아서 양을 인도한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유혹을 따라간 영혼들을 찾으십니다
알지 못하여서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자를 찾으십니다

예전에 설교제목을 길게 정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설교 제목이 좀 짧습니다. 설교제목을 다시 좀 알려주십시오?”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입니다.”
그랬더니 인쇄소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한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 외에 더 있습니까?”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목사님은 약간 늦게 도착하셔서 어제 준비한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님은 어딘가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처럼, 계속 이 제목을 몇 번씩 되 세기고 계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때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갑니다.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갖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보다 쉬운 것들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단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해이해 지도록 유혹합니다. 편안하다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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