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9. 개혁의 완성) / 본문 : 계 21:4-7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날에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의사 선생님들입니다. 아픈 사람이 없으니 의사 선생님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들, 아무래도 직업을 빨리 다른 것으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건축은 어떻게 될지. 아마 주님이 우리의 집을 짓고 계신다고(요 14:2) 했으니 건축하시는 분도 다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만큼 병을 앓았는데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질병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세기 재앙으로 불렸던 페스트까지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호흡하던 공기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사망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유해한 박테리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개혁이 완성되는 날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과거와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일단 오염된 땅과 하늘이 바뀝니다. 새것으로요.
한 어린이의 어머니인 여성도가 죽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울지 마! 네 엄마는 하늘로 갔어!”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이를 달랬습니다. 이튿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관은 무덤을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는 “여기가 하늘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는 파 놓은 무덤을 보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눈물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함 없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본문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의 절대성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의 시작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나올 수가 있었고 그의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갈 1:7-8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적 성격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절대화, 진리의 절대화, 복음의 절대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이 현대의 큰 병인 상대주의에 빠져 가지고 말이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래 생각하고는 근데 요것이 조금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허우적거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 이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누구라도,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 절대적 신앙, 이 절대적 확신, 이것이 그 마음속에 솟아오를 때 개혁의 용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입니다. 누구 눈치나 보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에 용기를 내세요.

존 칼빈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가 있습니다. 루터 다음으로 이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되는 훌륭한 개혁자인데요. 그분이 쓴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크고 방대한 책인데 기독교 교리를 잘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개신교 교리의 바탕이요 근본입니다. 한마디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전에 이런 책을 썼을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칼 빈이 27살 때 쓴 책이라는 겁니다. 27살에 이런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대단한 복음적 교리를 완성한 존 칼빈이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을 하려고 하니까 너무 핍박이 많아요.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역시 학자가 조금 약한 데가 있어요. 이 대 학자가 독일 스트라우스버그라고 하는 곳에 가서 조용하게 글이나 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야겠다 생각을 하고 도피 행각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제네바에 머물렀습니다. 제네바에 갔을 때에 거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 칼빈을 딱 만나더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여기서 종교개혁을 이룹시다, 하고 붙드는 겁니다. 칼빈은 “아니요. 나는 조용하게 책이나 쓰면서 살렵니다.” 그럽니다. 영 설득이 안됩니다. 말로, 교리로 칼빈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나 파렐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칼빈을 향해서 마지막 파렐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는데 만일에 당신이 우리의 요청을 듣지 않고 저 시골로 가 버린다면 당신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칼빈은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다. 나를 제네바로 보내셨다. 이 날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제네바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는 스투트가르트라고 하는 곳에서 그가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거기 한 번 방문하게 되면은 루터가 섰던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게되면 꼭 한번 그 자리에 서 보려고 합니다. 그가 거기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의 용기입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서 한 말이 너무 유명해서 이 말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보름스 회의의 기왓장처럼, 집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그 용기, 그게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복음의 용기요 진리의 용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확실한 용기입니다. 본문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간 것입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새롭게 대통령이 되는 분마다 개혁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에서 자신은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개혁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만있고 다른 사람 뜯어 고쳐서 사회 개혁을 완성시켜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암을 죽이는 죽지 않는 세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암으로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열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죽지 않는 세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암세포였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 그것이 암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회 개혁을 한 집단이 바로 공산당입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고리키라는 사람은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 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 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에스토니아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지난 70여 년 간 끔찍한 공산주의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으며 살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나라에서 그렇게 살기 원했는데 마치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 간 다녔는데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사회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고 개혁되어집니다. 천하보다 내가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볼 때 자기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자기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 없이는 개혁이 되질 않습니다. 신앙 없이 개혁해 보아야 인공적인 암 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죽고자 하는 진리에 설 때,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서만이 개혁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믿음이 들어가면 사람이 정직해 집니다. 사단은 거짓 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요 참 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로 개혁된 우리 모두가 들어갈 것입니다. “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오(poiw’)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어주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이오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부여되었는데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새 하늘과 땅에 들어갈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남아공 양승록 선교사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6.25처럼 슬픈 날이 아니지만 힘든 날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교회 노총각 이삭의 결혼식 날이었답니다. 토요일 예식은 신부집에서 9시에. 축복의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하객도 없고, 천막도 말 그대로 걸레모양. 급기야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결혼식장을 교회로 옮겼고, 교회는 장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가는데 기다리는 또 다른 문제1. 교회 담임목사의 주례거부. 이유인즉, 신랑이 먼저 찾아와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우리교회 목사는 주례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고. 문제2. 신부가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신랑측에서 소를 잡아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머리 절반과 다리가 오지 않았기에 신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우여곡절 끝에 오후 늦게 진행되었답니다.

제가 5년 전에 주례를 처음 했던 자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축복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5년 전 이날을 생각할 때 오빠들은 전원 결혼 반대로 예식장도 안 들어오고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과 그늘 밑에서 평생 사셔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혼자 어쩔 줄 몰라하시며, 결국 오빠들의 비 협조로 손님차도 제대로 초청하지 못하고 치룬 막내딸 결혼식을 생각하며 마음 무너져 하셨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을 하시며 너무 가슴아파 우십니다.” 결혼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도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간증도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 하니까 너무 사회적이고 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우리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이 됩니다.

개혁의 완성은 그 날에 주님이 장식하십니다. 그 때에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시는 아픔과 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상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개혁을 이루어 내셔서 새로운 세상에서도 반드시 다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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